북유럽 르네상스와 마니에리스모

우리는 지금까지 초기부터 전성기까지의 르네상스를 만나보았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나요? 바로 이탈리아, 그것도 피렌체나 로마 같은 몇몇 도시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는 점이죠. 그렇다면 이탈리아를 벗어난 북유럽의 예술은 변화나 발전이 없었던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는 조금 느낌이 다릅니다.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기를 거치며 남겨진 다양한 유물에서 영감을 받았다면, 북유럽 예술가들은 자연에 눈을 돌렸기 때문이죠. 이들은 사람부터 사물까지 모든 것을 세밀하고 꼼꼼하게 묘사했습니다. 초기에는 이상적인 비례를 가르쳐줄 고전기 작품들이 없었던 탓에 다소 뻣뻣한 형태로 인물이 그려졌지만, 이후 이탈리아 작가들의 영향을 받아 실감나는 형태로 묘사가 가능하게 되었죠.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60x82.2cm, 1434년

북유럽에도 많은 작가들이 있었지만 대표적인 두 명의 작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얀 반 에이크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이란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중앙에 위치한 거울에도 서약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화가인 반 에이크 자신의 모습까지 담겨 있을 정도로 세세한 묘사가 압권인 작품이죠. 그는 유화의 발명자인 플랑드르의 화가 후베르트 반 에이크의 동생이기도 한데요. 그는 이 발명 덕에 생전에 오른팔이 성스러운 유품으로 보관되도록 예정되었을 정도였다고 하죠.

알브레히트 뒤러, <삼위일체에 대한 경배>, 135x123cm, 1511년

두 번째는 알브레히트 뒤러입니다. 사실주의적인 북유럽 미술의 특성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성과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죠. 그는 유화, 수채화, 템페라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모두 잘 활용했지만, 판화를 주요 수단으로 활용한 최초의 화가로 가장 유명합니다. 이전 시대에 판화란 매우 천대받는 기법이었습니다. 결과물이 고작 단순한 흑백 대조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는 목판화에 빽빽한 선을 사용하여 유화 못지 않은 질감과 색조를 묘사해 냈습니다.

더불더 그는 워낙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탓에 ‘북유럽의 레오나르도’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식물과 자연을 깊이 연구했다고 알려지는데요. 이는 예술이란 자연을 기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예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배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지식을 동료 예술인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원근법과 비례에 관한 책을 내기도 했죠.

엘 그레코, <성전을 정화하는 그리스도>, 106×130cm, 1600년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보죠. 바로 16세기 중반, 정확히는 라파엘로가 죽은 1520년부터 시작된 마니에리스모 시기입니다. 이 때는 바야흐로 전성기 르네상스의 세 거장들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간 뒤였습니다. 때문에 당시 예술가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보단 마니에라(maniera), 즉 기존 양식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이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마니에리스모는 ‘매너리즘’으로 번역됩니다. 우리는 흔히 발전하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졌을 때 이 용어를 사용하곤 하죠. 즉, 사람들은 이 시기를 발전하지 못한 시기 혹은 이전 작품의 답습에만 머문 시기로 생각했던 겁니다.

당대 화가들은 뭔가 새롭고 이색적인 것을 만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는데요. 그러다 보니 몸 전체가 한껏 비틀려 있거나 육체가 왜곡되어 그려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후대인들은 이것이 ‘지나치다’거나 ‘비현실적’이라며 비판했죠. 하지만 마니에리스모의 작품들은 20세기에 접어들며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의 정의에 대한 물음이 생겨났기 때문이죠. 완벽한 비례, 매끈한 선만이 아름다운 것일까요? 기괴한 것, 즉 그로테스크한 것은 추한 것일까요? 아니, 추한 것은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린 이 시기의 작품들을 보며 이런 질문을 다시금 던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