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근대 화가, 고야

1808년 5월 3일은 스페인인들에게 비극적인 날이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침공을 당했습니다. 프랑스의 강력한 군대에 의해 스페인은 점령당했고,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을 폐위한 뒤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국왕으로 앉히려 했는데요. 스페인 민중은 이에 분개해 봉기했지만, 그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이날 5000여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의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죠.

<1808년 5월 3일>, 프란시스코 고야, 캔버스에 유채, 347x268cm, 1814년, 스페인 프라도미술관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이날의 참상을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에 담았습니다. 그림 속 시민들은 기껏해야 칼 혹은 가위를 든 채 프랑스군에 의해 무력하게 쓰러져가고 있죠. 고발은 여기에서 그치치 않습니다. 1810년부터 1814년 사이에는 판화집 <전쟁의 참화>를 만들어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이 자행한 잔혹한 행위를 고발했으며, 1820년부터 1822년 사이에 제작한 벽화는 ‘검은 그림’으로 불리며 스페인 궁정과 교회의 타락상을 고발했죠. 결국 그는 이 그림을 모두 그린 뒤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합니다.

저항 정신이 가득한 그의 그림은 당대 사회적 혼란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앞서 말했듯 프랑스의 침공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으며, 이후 다시 복귀한 국왕 페르난도 7세 역시 국내 자유주의를 탄압하며 프랑스 점령기와 다를바 없는 상황을 만들었죠. 타락한 왕실과 민중 억압에 실망한 그는 결국 궁정화가의 자리에서 물러나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폭로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의견은 엇갈립니다. 누군가는 그의 그림을 보며 비리의 고발자이자 정의의 투사로 추앙하는 반면, 또다른 누군가는 그가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를 그린 시기를 두고 프랑스 점령 시기가 아닌 페르난도 7세의 복귀 시점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이 그림이 단지 자신의 친프랑스적 행적을 가리기 위한 용도에 불과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가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폭로하는 그림을 그린 것은 물론, 주제에 새로운 시선을 부여함으로써 그 의미를 해체한 인물이라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습니다. 최초의 근대적 화가이자 어느 주의(ism)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이 바로 고야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