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력전: 1차대전과 새로운 정치경제의 등장

영미권에서는 1차 세계대전을 “The Great War”라고 부릅니다. 이전 전쟁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였고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죠. 전쟁 초기까지만 해도 당대인들은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만, 전쟁 기간 동안 목숨을 잃은 사람은 1200만여 명에 달했고, 전쟁으로 인한 기아와 질병으로 희생된 사람을 포함하면 그 수는 2500만여 명을 웃돌았습니다. 영국군의 경우 참전한 장병의 12%가 죽고 38%가 부상을 당해 총 사상자의 규모가 326만여 명에 달했어요.

죽음에 있어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1차대전의 무수한 사상자 수를 지켜보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을까요? 세계 수십개국에서 수백만 명의 군인이 몇 년 동안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이때까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특정한 전장에 수많은 군인들과 물자를 보낼 수 있는 조직력과 동원력이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근대 국가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할 힘이 있었습니다.

프랑스를 예로 들면, 전쟁 초기인 1915년 10월까지만 544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군에 소집되었습니다. 각 국가는 자원입대나 징집을 통해 군인을 모집했는데요. 국가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열망은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열병처럼 다가갔습니다. 영국의 경우 전쟁의 첫 두 달 동안 76만 명 이상이 육군에 자원입대할 정도였으니까요. 이 수만 해도 전체 전쟁 기간 동안 영국 육군에 입대했던 인원의 15%에 달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참상이 전해지면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징집을 기본으로 하게 되었죠.

유럽의 국가들은 수백만 명의 군인들을 동원하고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만큼의 노동력이 사라져도 국가의 식량과 필수품 생산을 유지해야 했죠. 따라서 국가의 전쟁 노력은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이 전장에서 싸우는 동안 후방에서는 국가의 경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군인들이 사용하는 무기와 보급품, 그리고 새로운 군인들을 만들어내야 했어요.

국가는 노동력을 조직하고 자원을 동원하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여성이 산업과 농업 분야에서 일하도록 하고 계획을 통해 적절한 생산량을 맞추었죠. 이러한 ‘후방전선’에서의 노력은 전쟁을 국가 전체의 과제로 만들었습니다. 이 전쟁은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총력전’이었던 거예요.

이 과정에서 많은 정부들은 기업과 노동자들의 세계에 깊게 개입하게 됩니다. 시장의 자율성에 기대해서는 필요한 물자를 적절하게 배분할 수가 없었거든요. 국가가 생필품의 가격과 임금, 노동계약과 생산계획 등과 관련된 의사결정에 개입하면서 노동자, 기업, 정부의 초보적인 합의기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전쟁 이전까지 국가의 시장 개입을 혐오하던 영국이나 미국도 이러한 변화를 따랐습니다. 다만 많은 경우에 기업이 이익을 챙겼고, 이들을 ‘죽음의 상인’이라고 비난하는 시민들이 많아지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합의기구들은 전쟁이 끝나고 폐지되었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고 국민경제를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었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알게 되었던 것이죠. 얼마 지나지 않아 서구 국가들이 또 다른 국가적 위기를 맞았을 때, 각국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