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최고의 초호화 백화점, 그 이름은 ‘삼풍백화점’

압축성장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


사망 501명, 실종 6명, 부상 937명, 재산 피해액은 2,700여억 원. 한국전쟁을 제외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가장 큰 인적 사고, ‘삼품백화점 붕괴사고’를 아십니까?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벌어졌던 건국 이래 최악의 참사였습니다. 게다가 이 붕괴사고는 너무나도 명확한 인재(人災)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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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오늘은 서울의 알짜배기 땅 강남 한가운데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대형참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알아봅니다.


‘건설’이 곧 국가성장의 동력이 되었던 시대


창업주 이준은 1970~80년대 강남개발 열풍 때 건설업으로 돈을 번 사람입니다. 그 시절에는 건설업만큼 돈 벌기 좋은 사업도 없었죠. 1922년생인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갔다가 1941년 중국 베이징에 있는 보인대학에 다니다 해방 후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만주와 베이징에서 오랜 시기를 보냈기에 뛰어난 중국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한국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 요원으로 근무하기까지 했죠. 이때 그가 맺은 인맥이 그의 인생에 펼쳐질 앞으로의 승승장구를 보장해주었죠.

ⓒ이준 회장


1963년 그의 나이 43세에 미군 군납 건설을 담당하는 ‘동경산업’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건설업에 뛰어 들게 됩니다. 이후 사업이 커지면서 1967년 회사이름을 ‘삼풍건설산업’으로 바꿨죠.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면 맺은 군 출신의 정계 인사들은 그의 끈끈한 인맥이었습니다. 바로 그 인맥을 활용해 을지로에 삼풍상가, 여의도에 순복음교회, 청계천에 평화시장을 짓게 되었죠. 1970년대에는 건설업과 함께 부동산 투자까지 하면서 큰 부를 쌓게 되었죠.


하지만 삼풍건설에게 있어 제대로 된 잭팟은 바로 강남개발이었습니다. 1974년 서초동에 5만 7천 평을 사들여 주한미군 주택단지를 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강남개발에 발을 들이밀었습니다. 바로 이 땅이 1987년 삼풍백화점과 삼풍아파트가 건설되는 바로 그 땅이었죠. 그렇게 회사를 키우는 이준은 ‘삼풍그룹’을 결성하고 회장 자리에 오릅니다. 이후 공격적인 인수확장을 통해서 1996년 그룹이 해체되기 전 재계 30위권에 오를 정도로 대기업이 되었죠.


거대한 소비공간, 강남의 탄생


삼풍백화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백화점이 만들어지던 당시, 그러니까 1980년대 강남의 위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1980년대 강남 사람들은 부동산을 재미를 보고 있었습니다. 부동산 자산만으로도 부잣집 소리를 들을 정도로 부동산 가격은 강남 아파트 중심으로 폭등해 있었죠. 1960년대 후반부터 안정적인 월급을 통해 형성되던 중산층들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상류층으로 한 단계 도약하고 있었던 것이죠.


1980년대 압구정동 일대는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상가가 발달하고 비교적 부유한 계층이 살고 있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강남이 “부촌”이 되었던 것이죠. 이른바 ‘강남문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입니다. 주부들은 “문화센터나 미술관(화랑), 예술극장 등에서 만나 취미생활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고, 남성들은 점심 한 끼에 1만 원을 훌쩍 넘는 호텔 식당에서 모임을 즐겼죠.


‘강남문화’는 “신흥부유층”으로 불리던 강남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문화였습니다. ‘유흥가’로만 치부되던 70년대의 강남 이미지를 벗고 새로운 강남의 문화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죠. 이때부터 강남 곳곳에 화랑과 음악 감상실, 상설극장, 시 낭송을 위한 작은 카페, 미술관 등 “고급스런 공간”들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1980년대 중반 이른바 ‘3저 호황’이 불어닥쳤죠.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경제성장의 시기였습니다. 강남은 이때 거대한 소비시장으로 주목받습니다. 이때부터 강남은 단순히 부유층들이 살아가는 주거 중심의 공간을 넘어, ‘대량소비의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었던 것이죠. 대형백화점과 쇼핑센터가 줄지어 지어졌고, 고급 외식업체과 부유층을 상대로 한 접객 업소가 성황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분위에 편승해 만들어진 곳이 바로 삼풍백화점과 삼풍아파트였습니다. 위치도 강남의 한가운데였죠. 2-3호선의 환승역인 교대역 인근이었고 서울고속버스터미널도 가까웠습니다. 버스부터 지하철까지 사통팔달의 위치였죠. 게다가 주변에는 삼풍아파트와 같은 부유층의 거주공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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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백화점은 초호화 쇼핑몰이 될 수 있었습니다. 명품 브랜드의 천국이었죠. 디올, 샤넬 등 명품 화장품 브랜드부터 에스티 로더, 겔랑, 랑콤, 시슬리, 구찌, 버버리, 페라가모, 베르사체, 겐조, 막스마라 등의 수입 명품 브랜드들이 대거 입점하면서 ‘사치 1번지’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죠.


거기에 대형 수영장을 비롯해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갤러리까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식품매장에서는 프랑스산 고급 버터, 블루베리 치즈케이크를 팔았고, 흔치 않았던 고급 커피매장이 백화점 내에 입점해 있었죠. 건물 중앙에는 고급 스포츠카 부가티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삼풍백화점’은 중산층을 넘어 부유층이 되어 버린 강남문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비리’가 낳은 ‘부실’이라는 마귀


그러나 강남의 상징, 삼풍백화점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설계부터 시공, 유지, 관리까지 모든 것이 부실했던 예고된 참사였죠. 5층 건물이 무너지고, 기둥이 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강남의 상징이 완전 붕괴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20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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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겠지만 5층을 식당으로 증축해서 사용하면서 무게가 가중되었던 점과 옥상에 설치된 냉각수 가득한 냉각탑 3대를 롤러를 장착해 옮겼던 점 등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거론되었습니다. 결국은 ‘돈’이었지요. 그놈의 ‘돈’을 아끼고 남겨 먹기 위한, 천박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민낯이었습니다. 부유함을 넘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자 했던 ‘화려한’ 강남의 민낯이었습니다.


심지어 붕괴의 조짐은 수일 전부터 나타났습니다. 벽에 금이 가거나 천장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는 등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경영진은 영업을 강행합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강남의 상징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이죠. 아니 정확히는 ‘강남 소비문화의 상징’이었죠. 어쩌면 이 붕괴는 2년 뒤 불어닥칠 ‘IMF 사태’의 예고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쌓아온 부유함의 끝을 예상했던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불안했지만, 그 뿐이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백화점의 임원진들은 붕괴 직전 건물 안에서 건물 보수와 관련한 대책회의를 진행하고 있었죠. 문제를 알고, 해결하려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때 무너지지 않았다고 제대로 된 대책이 나왔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결국 손님이 가득했던 삼품백화점은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 A동 전체가 붕괴되는 최악의 참사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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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떨까요? 붕괴된 그 자리에는 아크로비스타라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가 들어섭니다. 여전히 그곳은 강남의 ‘부’ 상징하죠. 과연 95년과는 다른 강남일까요? 그곳에 서 있는 그 화려한 빌딩은 천박함을 넘어선 새로운 대한민국, 아니 새로운 강남을 상징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