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한국사란 무엇일까?
한국사는 지역적으로 한반도라는 공간과 그 인근에서 전개 되어 온 역사 전체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역사적 계승성도 고려하여 고구려나 발해 등 ‘지금의 한반도’ 밖에 있었던 역사 역시 한국사의 범주에서 이해합니다. 즉 해당 지역에 장기간에 걸쳐 함께 생활하면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문화권을 형성하며 동일한 문화적 요소를 공유하고 공통의 역사적 기억과 집단적 귀속감정을 갖는 공동체들이 전개해 온 모든 역사적 과정 전체를 한국사의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켜야할 가치, 사관(史觀)
‘한국사’를 독립된 학문으로 인식하고 일정한 사료비판을 포함한 체계적 방법론에 의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앞서 살펴본 대로 ‘근대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어요. 그 이전까지는 전통적 관점인 ‘감계사관(鑑戒史觀)’이 지배적이었어요. 감(鑑)은 거울을 의미해요. 계(戒)는 규율을 의미합니다. 역사는 과거를 비추어 보는 거울(鑑)이며, 이를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규범적인 역할(戒)을 하는 것이지요. 동양권에서는 사서의 이름에 거울(鑑)이란 글자를 쓰기도 해요. 『자치통감(資治通鑑)』(중국,북송), 『동국병감(東國兵鑑)』(조선,문종), 『동국통감(東國通鑑)』(조선,성종) 『본조통감(本朝通鑑)』(일본, 에도막부)이 대표적 사례이지요.
한국의 ‘근대’는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근대 역사학 역시 이때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가장 먼저 신채호, 정인보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사관’이 형성됩니다. 당시 일제는 한반도 지배를 위해 ‘식민사관’이라는 것을 만들어 조선인들을 안으로부터 붕괴시키려고 했어요. ‘우리는 미개해서 일본의 지배를 받아 마땅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지요.
일본인과 조선인은 공통의 조상을 가진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조선은 반도적 특성으로 침략 받아왔고 자주적으로 역사를 발전시킬 능력이 없다는 타율성론(他律性論), 조선에는 봉건사회가 결여돼 있어 세계사처럼 보편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멈추어있다는 정체성론(停滯性論), 당파싸움만 하다가 분열돼서 망한 것이 조선인의 천성이라는 당파성론(黨派性論)이 골자입니다.
이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민족의 주체성과 우월성을 강조합니다. 일제가 의도한 ‘조선인의 자기멸시’에 대항하는 동시에 독립투쟁을 위한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맥락이지요. 즉 ‘일제 강점’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두고 이를 역사를 통해 극복·돌파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사관이 형성 된 것입니다.
같은 시기 사회경제사학도 등장합니다. 앞서 3장에서 설명한 ‘유물사관’과 맞닿은 사관이지요. 일제가 규정한 한국사의 특수성(특히 타율성과 정체성)에 대항해 백남운은 한국사의 발전을 세계사의 발전과정과 연결하여 설명했어요. 봉건제 결여론을 반박하며 통일신라 이후가 봉건사회라는 점을 찾아낸 것이지요. 그리고 향후의 역사발전역시 세계사의 법칙대로 발전한다는 것을 논증했지요.
한편 이런 이념적 흐름보다 문헌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사실규명에 주목한 실증사학(진단학회)도 있었어요. 랑케의 객관주의 입장을 계승한 것입니다. 이들은 엄격한 고증과 객관적 사실의 확인을 목적으로 했어요. 식민사학의 한국사 왜곡과 사회경제사학의 비실증적 태도를 극복하려는 학풍을 지니고 있었지요. 그러나 실증사학을 사관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기도 합니다.
휴전선 이남의 대한민국사, 국사의 해체!
해방이후 분단과 전쟁까지, 연달아 고난을 경험하면서 사회경제주의 사학자들은 북한으로 이동하고 남한에는 실증주의 사학자들이 남게 됐어요. 이후 남한 역사학의 전통은 실증주의적 성향이 짙게 배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해방 후 한국사 연구는 잔여 식민사학 극복을 위해 고군분투했고 내재적 발전론, 식민지 수탈론과 같은 담론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정치, 사회적 문제의 근원이 분단에 있다고 보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한국사학의 목표로 설정하기도 했어요. 이에 분단 극복의 소재를 일제시대나 해방 공간에서의 좌우합작,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의 연대에서 찾거나 일제시대 사회주의계열의 항일투쟁도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했어요.
이어 1970~80년대 노동자·농민운동의 확산과 자본주의 고도화로 인한 사회경제적 모순을 직감하며 ‘민중’을 변혁의 주체로 인식한 민중사학도 대두됩니다. 민중사학론은 아래로부터의 전체상을 제시하였고, 구술사나 미시사적인 접근을 시도하여 역사학의 학문적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90년대 이후 ‘국사(국가사, 국가의 역사)’를 해체하자는 주장도 등장합니다. ‘국사’는 제국주의와 대항하는 가운데 19세기 이후에 형성되기 시작한 '민족'이라는 신화로 구축된 허상이라는 주장이었지요. 개인사, 지역사 등은 ‘국사’의 역사에 가려 주목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를 보는 다원적인 접근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라도 국사는 해체돼야 한다는 주장이지요. 이러한 논의는 2000년대 들어서 학술대회나 토론회를 통해 치열하게 논쟁이 되기도 했습니다. ‘국사의 해체’는 앞서 살펴본 ‘탈근대’ 담론과 맥이 닿아있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한국사 연구, 그를 둘러싼 역사해석의 여러 관점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같은 과정은 현재도 진행 중이에요. 여러분의 가치는 무엇에 무게를 두고 있나요? 그것이 여러분의 사관을 결정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