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어떻게 유럽의 종교가 되었을까
로마 제국이 지중해 지역을 통합해가는 와중에 로마 제국 전체보다도 서구의 역사에 더 큰 흔적을 남긴 움직임이 시작되었어요. 기독교의 등장이었죠. 기독교의 창시자였던 예수는 기원전 4년에 태어나 1세기 무렵에 활동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려면 그 이전의 유대교 교리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교 교리가 통일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가 그들 모두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개혁적인 사상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는 신자들을 계층이나 민족으로 나누지 않았어요. 유대교가 오직 유대인을 위한 종교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엄청나게 큰 차이였죠. 예수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하층민까지 참여하는 계층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예루살렘의 성전 밖에서도 종교 활동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성전”이란 모두가 자유롭게 들어오는 종교 활동의 공간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아주 중요한 차이가 생기는데요. 유대교의 메시아는 유대인들을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민족적이며 정치적인 구원자인 반면, 기독교의 메시아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줄 보편적이고 영적인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바울과 베드로 같은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벗어나 로마 제국의 각 지역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 활동에 나섰습니다. 물론 기독교 내부에서도 유대인들의 보수적인 성향을 고려해 이방인 선교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바울 주도의 보편적 선교가 주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유대교가 로마 전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입니다. 로마 화재의 책임을 당시 막 성장하던 ‘불법종교’인 기독교에게 돌렸던 거죠. 바울과 베드로 모두 이때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로마 정부에게 기독교는 상당한 골칫거리였습니다. 로마는 지역 종교에 대해 기본적으로 관용의 원칙을 지켰습니다만, 기독교의 경우에는 좀 달랐습니다. 황제까지 신으로 숭배하는 로마의 다신교에서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체제의 불안정 요소였기 때문이죠. 도미티아누스, 플리니우스, 데키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이르기까지 로마는 크고 작은 박해를 가했습니다. 로마의 박해가 항상 전면적이고 타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해의 시간이 길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311년까지 거의 300년 동안 이어졌으니까요.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정부의 입장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313년 통치권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부터입니다. 전설은 그가 아주 중요한 전투 이전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죽기 전까지는 세례를 받지 않고 태양신을 숭배했어요. 사실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고려가 더 중요했을 겁니다. 당시 기독교 신자는 로마 인구의 10퍼센트 가량이었는데 그 비율은 콘스탄티누스가 세력을 구축하려 했던 동방에서 특히 더 높았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했던 그의 전임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지역민들의 민심을 얻기에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많지 않지 않았을까요.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합법화하고 장려했으며 죽기 전에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기독교 국교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후의 황제들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고 로마 정부가 나서서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억압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왜 기독교는 로마 시대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을까요? 기독교 이전의 종교는 정치종교의 성격이 짙습니다. 개인의 정신적 고통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안정이 주요 목적이었다는 뜻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개인들에게 다가갔던 기독교는 당대인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러면서 사치스런 의례를 멀리했고, 또 특정한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빈부에 상관없이 보편적인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어요. 꽤 매력적이지 않나요? 질투하고 탐욕하고 바람까지 피는ᅠ로마의 신들에 비해 기독교의 신이 절대적으로 선하고 윤리적이었다는 점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로마의 종교가 된 기독교는 통일된 교리와 기반을 얻게 되고 로마의 멸망 이후에도 유렵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5년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에서 각 기독교 분파들이 삼위일체설에 대해 동의함으로써 교리를 일체화하고, 397년 신약성경을 공인하면서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완전히 벗어나 보편적인 종교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은 여기에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