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 긴 겨울의 끝에 피어난 두 번의 봄
서울에 봄이 지고, 광주에는 핏빛 겨울이 불어닥쳤다
광주는 여전히 겨울이다
“폭동은 전문적 선동꾼에 의해 발생하였지. 너희들이 부르는 임의 행진곡의 임이 누구야. 그 임이 누구냐고. 그 임이 김일성이야. 김일성!”
“전두환은 지금 돌아가셔서 안 계시니까, 내가 주동하겠습니다. 똑같은 저 헬기를 가져와서 한번 저 빌딩 그 자리를 향하여 사격을 한번 해보자고.”
1980년대 서슬푸른 신군부 정권 시기 안기부에서나 흘러나온 이야기인 것만 같다. 하지만 놀랍게도 저 말은 2023년 4월 극우 성향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광주를 직접 찾아가 거리에서 외쳤던 말이다. 광주시민들이 1980년 5월 한 달간 흘린 핏자국이 서려 있는 그 자리에서, 그리고 여전히 피해자들이 살아가고 바로 그 공간에서 외친 말이라니, 충격적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런 막말에 여당 최고위원이 동조하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국민의 힘 최고위원인 김재원이 전광훈 목사가 주관하는 예배에 참석해 “5·18 정신을 헌법에 넣겠다고 하는데 그런다고 전라도 표가 나올 줄 아느냐. 전라도는 영원히 10%”라는 말을 해 논란이 됐다. “표 얻으려면 조상묘도 판다는게 정치인”이라며 여당인 국민의 힘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인정하는 건 그저 전라도에 대한 ‘립서비스’라며 깎아내리기까지 했다.
그의 말과는 다르게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5·18 정신이 헌법 전문에 게재되는 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라고 이야기했다. 2022년에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5월 정신은 보편적 가치의 회복이고,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이라며 후보 시절의 생각이 변하지 않았음을 광주시민들 앞에서 다시 이야기했다.
이쯤 되니 헷갈린다. 도대체 무엇이 진심이란 말인가. 김재원 최고위원의 속내야 스스로만 알 일이겠다. 최고위원이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김재원 위원의 말 한마디의 무게 덕분에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 힘 지도부의 생각마저 의심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번 일로 말미암아 불과 40여 년 전 피해당해야 했던 광주시민들과 유가족들은 깊게 베인 상처 옆에 더 큰 상처 하나를 더해야 했다. 언제나 피해자의 위치에 있어야 했던 그들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그저 참담하기만 할 뿐이었다.
요즘 날씨는 봄을 지나 초여름의 문턱에 와있지만, 광주에는 여전히 봄이 찾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그날도 그랬다. 서울에는 잠깐이었지만, 봄이 찾아왔던 1980년 5월 그날 말이다. 그날도 광주는, 아니 더 정확히 광주만 유독 추웠다. 그리고 그 추위에는 핏빛마저 가득했다. 대체 그날 광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유신은 안으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총과 탱크로 잡은 권력은 매서웠다.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편법과 부정을 통해 재선까지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반공”과 “경제개발”이라는 지상과제를 성공시킬 적임자로 스스로를 낙점하며 대통령 3선에 도전한다. 물론 대통령의 3선을 허용하는 개헌안 또한 편법이었다. 그렇게 해방 이후 한국 역사에서 대통령 3선에 도전한 두 번째 인물이 된 박정희였다.
그렇게 온갖 부정 속에서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아슬아슬한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은 박정희는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냉전의 평화적 기류(이른바 데탕트)를 한국의 위기로 파악하기 시작한다. 그리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전 국민이 총화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고 얼마 뒤 1972년 10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국회를 해산시키고 유신헌법을 발표한다.
새로운 헌법은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채워졌고, 대통령은 긴급조치라는 초법적 통치 도구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한국에는 기나긴 “겨울공화국”이 시작된다. 정권수호의 선봉에 섰던 중앙정보부와 검찰, 그리고 경찰조직은 각종 ‘용공사건’을 만들고 직접 사건에 가담한다. 유신정권 하 대한민국의 국민에게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은 어불성설이었고, 국민은 그저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하는 동원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폭력적 통치는 결국 안으로부터 붕괴됐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으로 무너진 경제가 유신정권의 발목을 잡았다. 유신정권에 편승해 몸집을 불려 나갔던 기업들은 위기 극복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며 노동자 임금을 삭감하거나 일방적으로 폐업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YH무역주식회사가 대표적이다.
악덕 기업주에 맞서기 위해 YH노동자들은 야당이었던 신민당의 사무실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고, 경찰은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건물로 진입해 야당 의원들과 여성 노동자들을 끌어냈다. 그리고 얼마 뒤,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국회의원에서 제명해 버리자 이제는 부산과 마산의 학생, 시민들이 불같이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렇게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욕망은 마산과 부산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될 준비를 마쳤다.
1980년, 서울에는 불어닥친 찰나의 봄
안으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유신정권의 종말은 어처구니없게도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마무리된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겨울공화국” 유신정권이 우발적 총탄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이미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신정권의 최상단에 섰던 한 사람이 죽자 국가의 행정력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강제로 겨울잠을 자듯 억눌려 있던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곧 거리를 가득 메워 나갔다. 특히 대학생들은 3월 개강에 맞춰 “유신잔당 척결”과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1980년 대한민국 거리 곳곳은 민주주의의 물결이 요동쳤다.
한껏 들떠 있었던 시민들은 곧 대한민국에서도 다시금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오르게 된다. 유신이라는 기나긴 겨울을 버텨야 했던 야당 정치인들, 특히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과 김대중 또한 활발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이러한 민주화 물결의 중심에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있었다. 이를 흔히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염원과는 전혀 다르게 한편에서는 새로운 일군의 군인 무리가 권력의 공백을 장악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신군부’로 불리는 하나회 소속 군인들이었다. 신군부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뭉쳤고,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는 12.12쿠데타를 일으키고 사실상 대한민국을 접수한다.
명목상으로는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국정 운영을 책임져야 했지만, 신군부의 쿠데타 이후 영향력을 상실한 채 방관자로 전락한다.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쿠데타를 반대하는 군내 세력을 강제로 전역시키거나 보직을 변경해버리고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직해버린다. 그렇게 국회는 다시 해산됐고, 야당 정치인들의 활동은 규제된다.
유신이라는 늦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시민들은 민주주의라는 봄날의 햇살을 만끽하려 했지만, 신군부는 이를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렇게 신군부와 시민들은 거리에서 마주쳤고, 신군부는 계엄령을 무기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요구를 폭력으로 진압했다. 이에 맞서 시민들의 시위는 더욱 불같이 타올랐고, 5월이 되어서 절정에 달한다. 서울에서는 10만여 명의 학생들이 서울역에 모여들었고, 부산과 대구, 광주에서도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된다. 계엄령 철폐와 함께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거리를 가득 메웠고, 신군부는 “계엄령 하 질서확립”을 요구하며 이에 맞섰다.
봄의 끝자락에 광주에 찾아온 차가운 바람
1980년 5월 15일, 서울에 모였던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은 신군부의 총 앞에 사실상 항복한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다. “이쯤 했으면 신군부도 알아들었을 거야”라는 순진한 생각 속에서 결정된 회군이었다. 팽팽한 대치 이후 대학생들이 캠퍼스로 돌아가자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한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10월 27일부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은 내려져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1980년 5월 17일 전국으로 확대된 비상계엄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내려졌던 부분계엄의 상태에서는 계엄사령부가 국방부 장관의 통제를 받지만, 전국계엄의 경우 계엄은 계엄사령관이 전국의 모든 행정, 입법, 사법을 사실상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이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의 통제하에 있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사건의 핵심에는 전두환이라는 신군부의 수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뜻이다. 전국계엄 선포 이후 신군부는 곧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을 연행하고, 학생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겨울의 바람이 가장 강하게, 그리고 집중적으로 불어닥친 곳이 바로 광주였다. 전국의 모든 대학과 마찬가지로 광주에서는 학생회 간부들이 예비검속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학생운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것과 다르게 5월 18일 광주의 대학생들은 끈덕지게 전남대 앞과 광주역에서 시위를 이어 나갔다. 광주가 신군부에 의해 ‘타겟팅’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공수부대로 구성된 광주지역의 계엄군은 시위 중이던 학생을 비롯해 거리의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5.18광주항쟁의 서막이었다. 이튿날, 계엄군의 폭력적 시위진압에 저항하기 위해 시민들은 멈추지 않고 거리로 나갔다. 거리 곳곳에서 계엄군과 시민들이 충돌하기 시작했고,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갔다. 택시와 버스 운전기사들, 도시 빈민과 노동자들까지 시위에 합류했다.
핏빛으로 물든 오월 광주
계엄군의 시위진압은 잔인했다. 금남로를 비롯한 광주 전역에는 최루탄 쏘는 계엄군과 시위대로 가득했고, 시민들을 이 과정에서 무자비하게 폭행당하거나 연행되었다. 하지만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에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폭력이 거세질수록 시위대의 규모는 더욱 불어났고, 결국 5월 20일 계엄군은 시위 군중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해 4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후 시민을 향해 군이 총을 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21일 아침까지 시위를 계속이어 나갔다.
그렇게 맞은 5월 21일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공휴일을 맞아 더 많은 광주시민이 거리로 쏟아졌고, 계엄군은 광주로 통하는 시외전화를 끊어버리고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증파한다. 오전 10시, 금남로에 모인 5만 명이 넘는 시민들은 계엄군과 대치했고, 전남도청 주변을 에워싸며 도로를 가득 메웠다. 종종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그때마다 계엄군은 실탄을 쏘아댔다.
그러던 오후 1시 정각,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시민들이 다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를 이어가던 그 순간, 시위대를 향해 수백 발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학살의 시작이었다. 전남도청과 금남로 앞에서 섰던 비무장 시민들은 계엄군의 총기 난사에 하염없이 쓰려졌다. 금남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분 동안의 난사가 이어졌고 이후로는 저격수들의 조준사격이 시작됐다. 그날 죽은 광주시민들만 50여 명이 넘었고, 5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시위와 무력진압 과정에서 다수 시민이 희생되자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22일 잠시 퇴각했던 계엄군은 27일 새벽, 탱크와 중화기로 무장한 채 2만 5000여 명의 병력으로 도청에 집결해 저항하던 시민군을 학살했다. 이후 계엄군은 광주 전역을 돌며 광주항쟁 관계자들을 모두 상무대로 연행했다. 광주항쟁 관련 단체들에 의하면 항쟁 희생자는 당시 사망자 165명, 행방불명 65명, 상이 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만 376명이었다.
광주항쟁은 유신체제에서 신군부로 이어지는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싸움이자, 광주라는 특정 지역에서 고립된 채 맞이한 희생이었다. 이 잔인하고 안타까운 희생은 1980년대 재야의 사회운동 세력과 학생운동 세력에게 마음의 빚이기도 했다. 신군부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광주세대’라고 부르는 건 바로 이 마음의 빚 때문이다.
결코, 폭력으로만 통치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향한 광주에서의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정부 수립을 준비한다. 1980년 8월, 사실상 명목상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가 하야하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제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뽑는다. 10월에는 7년 단임제를 핵심으로 새헌법을 공포하고 1981년 3월 전두환은 선거인단 투표로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후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운 신군부는 마치 박정희와 일군의 군인들이 민주공화당으로 형식상의 민주주의를 구현했던 것처럼 민주정의당을 창당하고 국회를 장악한다. 주요 정치 인사들은 1985년까지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고, 야당이라 불리던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은 대부분 중앙정보부 후신인 안전기획부에서 만든 관제 야당이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할 부분이 있다. 유신의 끝을 만든 건 결코 김재규라는 ‘권력의 2인자’ 개인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이미 유신은 국민의 의지로 무너지고 있었다. 신군부의 5공화국도 마찬가지다. 총과 탱크로, 그리고 광주시민들의 피로 쌓아 올린 권력은 오래갈 수 없었다.
광주의 희생을 끝내 잊지 않았던 시민들의 목소리는 1987년 6월 10일 절정을 향해 달려갔고,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서 꽃을 피운다. 그렇게 민주화를 향한 투쟁의 열기가 지속되자 결국 전두환 정부는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조치를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하며 ‘백기투항’한다. 광주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장악했던 공허한 권력은 그렇게 7년 만에 무너졌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전제 쟁취라는 목적으로 분연히 일어섰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와 함께 대통령 권한 통제, 국민 기본권이 강화된 현행 헌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에 찾아온 두 번째 봄은 꽃샘추위 속에서도 현재 진행형이다. 광주는 여전히 꽃샘추위를 넘어 겨울의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것만 같다. 우리가 광주를 제대로 기억할 때, 그리고 그들의 희생과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광주에도 봄이 찾아올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