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비의 재발견, 신묘년조 해석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되는 인물, 광개토왕. 그를 논하지 않고는 삼국의 역사적 흐름을 명확히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친숙한 왕이다. 이러한 광개토왕을 모신 능비문이 조선과 근대 한국의 텍스트에 의해 다시 해석됐다. ‘신묘년조 해석’이라고 불리는 이 연구를 통해 도달한 광개토왕비문의 성격과 4세기 당시 한반도 정세가 정확히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장수왕,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고자 능비를 세우다!

중국 길림성 통화시 소속의 집안시에 있는 석비인 ‘광개토왕릉비’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20대 장수왕에 의해 건립되었다. 광개토왕릉비의 구체적인 위치는 압록강 중류의 북한 만포진에서 마주 보이는 통구 분지 일대이며, 고구려의 평지 도성이었던 통구성에서 동북쪽으로 약 4.5km 지점인 태왕촌대비가에 서 있다. 1928년 이후로 능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 두어지기도 했는데 현재는 대형 석조비각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사방을 방탄유리로 막아서 외부인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구체적인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능비문에 갑인년 9월 29일에 왕릉으로 시신을 옮기면서 비를 세웠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414년(장수왕 3)으로 볼 수 있다. 능비는 광개토왕이 묻힌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남쪽 약 400m 지점에는 왕릉급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태왕릉이 있으며, 능비의 동북쪽으로 약 1.7km 지점에는 구조적으로 국내성 도읍기의 가장 늦은 시기에 조영된 왕릉급 고분인 장군총이 있다. 현재 한국학계에서는 장군총이 광개토왕의 무덤이라고 보는 연구자가 많다.

능비에 대한 명칭은 여러 가지로 나뉜다. 광개토의 사망 이후에 그의 훈적을 기록했다는 점, 아들인 장수왕이 부왕의 무덤 인근에 세웠다는 점 등을 감안해 ‘광개토(대)왕릉비’, 혹은 ‘광개토왕비’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 ‘광개토왕’이라는 왕호 대신, 능비문에 보이는 묘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줄여서 ‘호태왕비’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부터 광개토왕비가 재발견되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광개토왕릉비의 존재는 차츰 잊히게 된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조선시대부터 능비와 관련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례로 15세기 「용비어천가」의 주(註)를 살펴보면 능비에 대해 “평안도 강계부 서쪽으로 강 건너 140리에 큰 들판이 있고 그 가운데 옛 성이 있다. 민간에서 말하길 대금황제성이라 한다. 성 북쪽 7리에 비가 있는데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이 둘 있다”고 묘사했다.

15세기 평안감사 성현(成俔)의 시 <황성 교외를 바라보다>를 살펴보아도 “넓은 황성 뜰은 긴 강가에 아득한데 … 당시의 종적은 찾을 길 막막하고 우뚝하게 천척비만 남아 있네 아! 글자는 읽을 수 없고 얼룩진 무늬만 어루만지네”라며 광개토왕릉비가 등장한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짧은 언급이 나오기도 했지만 사실상 조선 시기 문인들은 광개토왕릉비를 두고 막연히 금나라(여진) 황제가 세웠던 비석으로 인식하는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

근대 청나라와 일본 또한 광개토왕릉비에 주목했다고?

시간이 흘러 광개토왕릉비는 근대 시기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재발견된다. 청나라(만주족)이 중원을 통일한 이후, 17세기 중반에는 만주지역에 대한 봉금 조치가 내려졌다가 1874년경(청 말)에 집안 지역 회인현에 봉금령이 해제된다. 이에 19세기 후반 무렵 현지 농민이 광개토왕릉비를 발견해 조정에 보고하게 된다. 청 말 지식인들은 오래된 비의 서체에 대한 관심이 있었으므로 광개토왕비의 탁본에 대한 수요 또한 존재했다. 집안 현지에서 탁본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자연스레 생겨났고 1880년 후반 북경에서 전문 탁공을 파견해서 탁본을 제작하게 된다.

일본의 경우 1883년 일본군 포병 중위로 추정되는 사코 가게노부에 의해 탁본(묵수곽전본)이 소개됐는데 이를 토대로 일본 학자들은 연구를 진행했다. 수년 뒤 극우 학술지인 ‘회여록(會餘錄)’을 출간하며 고구려비라는 사실이 최초로 밝혀지게 됐으며 비문 연구가 본격화된다. 당시 일본 학계에서는 왜가 200여 년간 한반도 남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는 주장인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팽배해 있었는데 검증할 자료가 없던 상황이었다. 이들의 대표적인 주장을 살펴보면 “우리 일본이 과거의 속국이었던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정당하다”며 고대의 텍스트에 근대적 국민국가 관념이 투영됐음을 알 수 있다.

신묘년조 해석으로 드러난 역사논쟁의 실제!

1930년대 이후부터 한국 역사학자들은 일본 측 주장을 반박하기 시작했는데 ‘신묘년조의 해석’을 통해 반론을 제기했다. 신묘년조를 통한 정인보의 반론을 살펴보면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다. 백잔이 [왜와 통하여] 신라를 침략하였다”고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신묘년조 주요 구문의 주어를 고구려로 파악함으로써 비문의 주인공인 고구려에 유리한 정세로 이해한 것이다.

북한 김석형의 신묘년조도 살펴보자. 백제, 신라의 ‘열도 분국설’을 토대로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왜가 신묘년에 쳐들어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을 파(破)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는데 이 역시 바다를 건너 격파한 주체를 고구려로 파악해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도 고구려로 이해한 것이다.

사실 1차 사료 해석의 기본 원칙은 텍스트 자체에 근거한 해석이다. 그러나 한국 측 정인보, 김석형 등의 신묘년조 해석은 다른 문헌 자료를 근거로 당시 왜가 약소국이었다는 역사적 정황에 의거한 것으로서 신묘년조 문구 자체의 해석만 본다면, 일본측의 해석에 비해 어색한 점이 있었다는 한계를 가지기도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텍스트 내부로 들어가기’ 기법을 통해 도출해 낸 광개토왕비문의 성격을 살펴보면 광개토왕비는 역사서가 아니며 장수왕이 부왕의 업적을 과시한 훈적비였으므로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다분한 것이다. 실제로 광개토왕비문 텍스트 내에 설정된 국제 질서는 ‘고구려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 있는 백제와 신라’라는 과장 섞인 모습이었고 비문에서 왜의 존재 역시 고구려가 한반도에서 군사활동을 했던 ‘명분’으로 사용된 것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자면 왜가 전쟁을 주도하는 강대한 세력인 것처럼 설정해 부왕인 광개토왕이 강력한 악당인 왜를 물리치고 원래의 국제 질서를 회복했다는 극적 효과를 노린 과장의 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과도한 근대 국가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가 투영된 것으로서 19세기 말 이래 거의 1백여 년 동안 광개토왕비의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안정준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