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작
과학혁명에서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지적인 혁신은 이전의 유럽인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의문을 던졌습니다. 경험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흔들렸습니다. 교회의 교리, 그리고 왕의 권력이 신으로부터 내려온다는 왕권신수설 등이 대표적이었죠. 계몽주의 시대의 정치사상은 정치권력이 신이 아니라 이성의 힘을 지닌 인간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민중에게 큰 부담을 안기는 사회경제적 상황이 18세기에도 개선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조세 부담이 불균등하게 배분되었던 탓이었죠. 게다가 인류가 진보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보편화되고 있었으니, 무언가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습니다.
혁명의 물결은 18세기 후반기부터 유렵 전역에서 일어났습니다. 1760년대 중엽 스위스 제네바 공화국과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시작해 네덜란드(1781), 벨기에(1787), 프랑스(1789)로 확산되었습니다.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지역마다 다양했지만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국왕과 특권층의 자의적 통치에 반발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결사체가 등장했으며, 인간의 권리에 관한 문서를 공표하고 국민주권을 원리로 하는 성문헌법이 채택되었던 것이죠. 계몽주의 시대의 지적인 유산들은 혁명이 나아갈 길과 추구해야할 가치들을 알려주었습니다.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영국은 1763년 종료된 ‘7년 전쟁’을 계기로 세계 제일의 식민 제국이 되었습니다. 영국 의회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비용을 식민지에서 충당하려 했고 이전까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던 식민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했죠. 이에 따라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인지세법, 타운센드법 등을 도입해 식민지에 직접적으로 과세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영국 본토보다도 더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지니고 있던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사람들은 과세를 거부했습니다. 이 대립이 1770년 보스턴 차 사건 등을 거치며 격화되었고 결국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미국의 독립혁명을 주도했던 식민지 엘리트 계층은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었고 영국이 식민지인들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부는 생명, 자유, 행복, 재산 등 인간의 타고난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따라서 국가의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세를 결정한 영국의회에 식민지의 대표자가 없었던 것이죠. 식민지인들의 재산권을 동의없이 침해한 영국정부는 배격되어야 마땅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미국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했고 이러한 사상을 정리한 독립선언문과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과중한 조세 부담과 특권층의 부패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절대주의를 신봉했던 프랑스의 왕들의 착취가 특히 심했던 것도 한 이유였죠. 조세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는 전국의 대표자들을 파리로 불러모아 삼부회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제 3신분, 즉 부르주아와 평민의 대표자들이 신속하게 ‘국민회의’를 자처하고 입헌민주주의를 위한 헌법제정운동을 개시합니다. 국왕은 군대를 동원해 이를 저지하려 했고 프랑스 민중이 이에 반발해 바스티유 감옥을 쳐들어가면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과정은 혼란의 역속이었습니다. 혁명 세력 중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집단과 진보적인 집단이 계속해서 갈등했으며 단두대를 세워 서로를 숙청하기도 했죠. 대외적인 압력도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를 시작으로 혁명 프랑스를 두려워한 인접국들이 전쟁을 선포했던 것이죠.
프랑스는 국민개병제를 실시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전국에서 징병된 프랑스 군인은 다른 모든 국가를 합친 것과 비등한 120만명에 달했고 새로운 국가를 위기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민족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제 국가는 왕의 것이 아니라 인민의 것이었고, 인민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해외세력과 싸울 의지가 있었던 겁니다. 프랑스군은 많은 싸움에서 이겼고 혁명 프랑스는 승기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혁명 정부는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수시로 정권이 바뀌다가 결국에는 포병 장교 출신의 유능한 군인이었던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도 혁명 세력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하는 등 단지 프랑스인만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질서의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토지의 국유화나 시장가격의 통제 등 급진적인 정책 실험이 시도되기도 했죠. 단일한 국민성을 기초로 합리적이고 일원화된 조세 제도, 도량형과 언어의 통일, 지방행정제도의 정비 등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프랑스인들은 유럽의 구체제를 무너뜨렸으며 이성과 합리, 그리고 인민주권에 기반한 국민국가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