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역사의 모두를 다루고자 했던 사마천의 ‘사기(史記)’
사마천의 ‘사기(史記)’, 역대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저작으로서 동아시아의 고대부터 전근대 역사의 틀을 만들어낸 책으로 평가받은 바 있다. 또한 역사서를 서술하는 다양한 방식(ex. 편년체, 강목체 등) 중 하나인 ‘기전체’ 양식으로 작성된 최초의 사서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는 사기,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그리고 이 사기를 서술한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은 어떠한 인물일까? 그렇다면 사마천이 사기를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렇게 여러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며 후대 동양의 역사가들은 사기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오늘날의 독자인 우리들은 사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아보자.
시공간적 배경이 매우 넓은 통사, 사기!
대부분 사기가 유명한 역사서임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 수만 무려 130권에 달하는 만큼 사기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사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중국의 ‘전한’ 무제 시기에 살고 있었던 ‘사마천’에 의해 작성됐다. 이러한 사기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살펴보면 사마천이 살고 있었던 한 무제 시기부터 시작해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인류의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다시 말해 지금 내가 사는 이 시점부터 시작해 역사가 시작한 시점 그 모두를 다루고자 한 것이 사기의 시간적 배경이다. 사기 이후에도 적지 않은 역사책들이 시대별로, 왕조별로 기록을 하곤 했는데 이 서술 방식을 ‘통사’라고 일컫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기는 그야말로 인간의 역사 모두를 다루고자 했다.
공간적 배경도 굉장히 넓은데, 아마 중국을 중심으로 서술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그뿐만 아니라 사마천이 아는 모든 공간을 사기 속 배경으로 담으려고 노력했다. 즉 사마천이 살고 있었던 그 시기와 장소부터 그 장소들을 확대해서 사마천 자신이 알고 있는 이 모든 공간을 다 담고자 했다. 물론 여러 배경 중 가장 중요한 배경은 중국 대륙이었고 그 중국 대륙에서 점점 확장해 나갔다. 북쪽의 흉노 제국, 남쪽의 남월, 동쪽의 조선, 서쪽의 대원(현재 우즈베키스탄) 등의 나라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사마천, 아버지의 유언에 의해 사기를 쓰다?
사기만큼이나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의 인생도 드라마틱하다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기원전 2세기 후반부에 한나라 수도로부터 조금 떨어진 지방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주 어렸을 때 수도 근처로 와서 한 제국에 피어오르는 여러 가지 문명들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마침 사마천의 아버지가 당시 명칭으로는 ‘태사령’이라는 관직(현재 우리나라의 ‘국사편찬위원회’에 준함)에 있었는데 이러한 아버지의 도움으로 사마천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양하고 심화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약 스무살이 됐을 즈음 우리나라의 ‘고시’와 같은 시험에 합격한다. 황제의 바로 옆에서 ‘특사’의 임무를 받아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다가 아버지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아버지의 부름을 받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내가 하던 작업이 있는데 네(사마천)가 이어서 했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 작업이란 다름 아닌 ‘인류의 역사를 남기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고 이후 본인이 그동안 해왔던 것과는 다른 인생길을 걷게 된다.
유명한 동양 역사가들, 사기를 오해하다!
기원전 1세기 전한 시기에 사기가 쓰인 뒤 후대 동양의 여러 역사가들이 사기를 평가하기도 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주희(주자)는 사마천의 사기를 두고 “역사를 보는 것은 단지 사람이 서로 치고 박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서로 치고 박는 것이 무슨 보기 좋은 것이 있겠는가?”라는 이야기를 한다.
또한 “어떤 친구들을 보니, 스스로 <좌전>과 <사기>에 능통하다고들 하며,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성쇠를 아는 열쇠이며 성패의 단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 자네 자신과 관련된 일이 무엇이 있는가? 자기 스스로 마땅히 이해해야 할 많은 일이 있고 아직 제거하지 못한 많은 일이 있는데, 세상 성쇠와 흥망치란(興亡治亂)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곧 스스로 속이는 일일 뿐”이라는 말도 남긴다. 주희의 이러한 발언을 통해 사기를 다소 경시하거나, 혹은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없다는 오해를 주희가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게다가 주희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대부들 역시 사기와 관련된 많은 오해를 가진 채 역사를 이해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연암 박지원도 사기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박지원은 성리학에서 벗어나 우리가 흔히 아는 소위 ‘실학’을 받아들였으므로 사기에 대해 주희와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펼쳤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박지원 역시 “태사공의 책(사기) 중에서 <항우> 본기를 읽으면 절벽 위에서 전쟁을 구경하는 듯한 생각이 들고 <자객> 열전을 읽으면 고점리가 축을 치는 광경이 생각난다고 하는데, 이것은 늙은이의 진부한 이야기일 뿐 부엌 아래에서 숟가락을 줍는다는 따위의 발상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발언을 한다.
사마천이 말하고 싶었던 ‘역사가 해야 할 일’이란?
사기의 열전 맨 앞부분을 보면 ‘역사학이 해야 할 일’이란 과연 무엇인지 사마천이 제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과거를 기록하여 미래를 생각하라’는 말이 등장한다. 너무 당연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역사(과거)의 기록이 매우 중요한 점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핵심은 과거의 기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서술하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따라서 정확한 과거의 인식을 가지고 인간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건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말하는 ‘역사학이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이에 대해 잘 알려진 답이 있다. 바로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가 남긴 ‘과거와 미래(혹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인데 이 말을 두고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는 식으로 확장해서 해석하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사마천의 생각과는 사뭇 다르다. 사마천의 생각은 훨씬 더 전문적이고 진지했다. 과거의 것을 이용하여 미래를 단지 예측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멋대로 상상하지 말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하라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 사실이었는지를 늘 생각하고 연구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이것이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과거의 일이 미래에 반복적으로 순환한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통해 미래를 ‘생각’할 것을 당부했다. 지금 이 시대의 역사학자들이나 역사를 좋아하는 일반 사람들이라면 새겨봐야 할 말이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