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인식, 객관과 주관의 경계
여러분은 언제 일기를 쓰나요? 하루에 일어났던 일과를 빠짐없이 모조리 기록하나요, 아니면 있었던 일중에 중요하거나 기억할만한 것, 혹은 뿌듯했던 일을 위주로 쓰나요. 이것은 일기를 쓰는 입장에서도 적용되지만,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입장에서도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으면서 “아 그날의 날씨는 맑았구나.”, “아 그날 사건이 일어났구나.”라는 ‘사실’파악을 위주로 읽을 수도 있을 겁니다. 혹은 일기를 보면서 글쓴이가 왜 이 내용을 굳이 썼을까를 생각하면서 일기를 읽을 수도 있겠지요. 역사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다? 아니면, 선택적으로?”와 같은 물음이 근대 이후 역사학에서 중요하게 문제 중의 하나가 되었어요. 그리고 과거의 기록을 대하며 “역사학이란 과거에 있었던 사실 자체를 인식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록자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나아갔지요.
앞선 물음이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 그 자체를 탐구하는 객관적 의미의 역사연구라고 할 수 있어요. 반면에 후자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이 역사연구의 대상이 되지만 과거의 사실 그 자체가 바로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며 가치 판단에 입각해 선택된 과거의 사실이 역사를 구성한다고 보는 역사연구입니다. 전자를 ‘사실로서의 역사(Geschichte)’, 후자를 ‘기록으로서의 역사(history)’라고 부르지요. 근대 이후의 역사학은 두 가지 물음에 대답해 오면서 전개됩니다.
이와 같은 물음은 ‘역사를 기록’할 때도, ‘역사를 탐구’할 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기록을 통해 과거의 사실들을 추출해 낼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이 기록이 가진 의미를 추출해 내는데 까지 이르러야 하지요. 예컨대 기원전 49년에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사실로서의 역사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유독 카이사르가 그 강을 건넌 것이 기록되었고, 의미가 있는 것은 루비콘 강을 건너는 카이사르의 결단이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됐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바로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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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인식
3,4살 아이들이 말하기 시작하고 세상에 궁금증을 가지면서 오는, 어른들에게는 공포의 시기가 있습니다. 바로 ‘뭐야?’와 ‘왜?’의 시기 입니다. 여기에서 ‘뭐야’는 아주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왜’는 인식론적 질문인 것이지요.
사람은 두 가지 방식으로 사고합니다. 예를 들어 컵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컵은 내가 눈을 감고 있든, 뜨고 있든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내가 인식하든 말든 관계없이 그것은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즉 존재론은 실체가 개인의 인식범위를 벗어나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논리입니다.
반면 그 자리에 컵이 있다는 것을 내가 감각기관을 통하여 알고 인지하지 않으면 그 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식론적 사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실체는 인간이 인식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존재하든 그것을 내가 인식할 때야 비로소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보는 논리입니다. 김춘수의 꽃과 같은 존재인 것이지요.
사실과 기록, 객관과 주관
역사를 기록하고, 그런 역사기록을 탐구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사유방식인, 존재론적 사고와 인식론적 사고가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겠네요. 사실로서의 역사, 즉 ‘본래 그것이 어떠했는가’는 존재론적 사고의 유형이자, 객관을 탐구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기록으로서의 역사, 즉 ‘많은 것들 중에서 기록된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역사가의 주관이 반영된, 역사가의 인식을 거쳐 의미를 가지게 되는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고하는 두 가지 방식이 역사인식에도 적용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