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마케터가 보는 책에 관하여
책 아래에 깔려 죽어도 좋으니..
같은 책을 반복해 읽다보면 밑줄 긋는 페이지가 달라질 때가 있다. 시절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당시의 마음에 따라 활자 속에 ‘감정’을 투영시키기 때문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봤던 영화인데 눈물이 나는 구간이 달라지고, 웃음을 터뜨리는 구간이 달라진다. 그건 우리가 감정적으로 성숙해졌음을 인지 시켜주는 것과도 같다.
나는 허무맹랑한 판타지 문학을 사랑했다. 그리고 자극적이지 않은, 갈등 없는 담백한 시와 에세이도 좋아했다. 스토리라는 게 당연히 기승전결로 흘러가는 게 맞다. 하지만 나는 독특하게도 갈등의 ‘절정’을 매우 불편해했다. 그럼에도 왜 판타지 문학을 좋아했느냐고 묻는다면 판타지 문학들은 대체로 해피엔딩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이 마주한 고난과 역경의 시퀀스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결국 해피엔딩이 될 거니까. 허무맹랑한 문학에만 빠져 살던 내가 현실의 뭇매를 아주 씨게(?) 두들겨 맞은 시기가 있었다. 그 계기로 내가 사서 읽는 책의 분야를 모조리 바꿔놓게 되었다.
온라인 4대 서점이라 불리는 교보, 예스24, 인터파크, 알라딘의 도서 물류 창고는 대부분 경기도 파주에 위치해 있다. 당시 경기도 파주에 살고 있었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 일을 구하면서 물류 창고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온라인 서점 매출 2, 3위를 다투던 인터파크 도서 물류였다. 새벽녘부터 빨간 손바닥의 목장갑을 끼고 수 천 평이 넘는 물류 창고 안을 뛰어 다니며 주문이 들어온 책들을 찾는 일을 했다. 책들이 무덤처럼 느껴졌다. 그 수많은 책들에 깔려 죽는다면 제법 멋진(?) 죽음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주문서를 들고 돌아다니다가 드라마틱하게 눈이 마주친 책이 있었다. 인생학교 시리즈 중 알랭 드 보통의 《섹스》다. 회색 표지의 강렬한 빨간색 표제가 인상적이었다. 그 책이 쌓여있는 섹션 번호를 외워두고 쉬는 시간이 되면 그 섹션으로 달려가 몇 페이지씩 읽어 나갔다.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허구이지만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환상의 나라가 와장창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왜 충격적이었느냐 라고 묻는다면, 태어나서 제대로 읽어본 ‘인문학’이었기 때문이다.
책과 썸타고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섹스》뿐만 아니라 인생학교 시리즈를 하나 둘 씩 사서 읽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그 책을 낸 출판사에 면접과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마치고 나오는 길, 선물로 줄테니 골라 보라며 여러 권의 책들을 건네 받았다. 그 책들 가운데 인생학교 시리즈 톰 체트필드의 《시간》이 있었다. 그 순간 ‘감히’ 들었던 생각이 있다. “나 인문학이랑 뭐 있는 건가?”
그렇게 출판 마케터가 되고부터 경력이 점점 쌓이더니 책을 보는 시선이 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책의 ‘기능’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책 보다도 상품의 기능을 따졌다는 표현이 확실할 것 같다) 내 기준에서 책의 ‘기능적 측면’이라는 것은 아래와 같다.
1. 표지라는 프레임 안에서 제목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읽히느냐
2. 띠지 카피는 얼마나 매력 발산을 많이 하는가(실제로 띠지는 마케팅 관점에서 매혹적인 세일즈 카피를 넣기 위한 기능적 역할을 한다)
3. 경제경영 또는 자기계발에 거의 해당 되긴 하지만 ‘하시라’(페이지 아래 장제목이나 도서명을 가리킴)가 있는가
4. 실용서의 경우 판형과 펼침 제본이 얼마나 적절한가
그 밖에도 분야에 따라 많은 기능들을 따져 묻게 되는데 이건 당시 가졌던 직업병과 같은 거였다고 생각한다. MBTI 성향으로 따지면 감성적 F형이었던 인간이 상식과 논리를 따지는 T형인간으로 (재직 당시) 살았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도 그런 기능의 측면을 고려하며 책을 사서 보는지를 묻는다면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다. 이제는 복세편살을 인생에 적용해 살고 있기 때문에 가슴을 울리는 제목,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만 있어도 충분해졌기 때문이다.
마케터들이 ‘책’을 고르는 기준
한번쯤은 현직 마케터들에게 묻고 싶었다. ‘상품’이라는 것의 기능과 가치를 떠나서 우리가 지식을 욕망하기 위해 읽는 이 책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나와는 얼마나 다른 책이라는 세계를 그리고 있는지.
🦝 레서(콘텐츠 마케터, 5년차)
콘텐츠를 만드는 입장에서 여러 번 되풀이 해서 읽게 되는 책을 사서 보는 편입니다. 요즘은 책이 상품화 되어 있다 보니 SNS를 통해 요약된 콘텐츠라던가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를 접하면서 접근하는 허들이 낮아졌잖아요. 그런 스낵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활자로 읽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책에 시선이 가는 편입니다. 최근에 그렇게 해서 구매해 읽었던 책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해달(콘텐츠 마케터, 5년차)
베스트셀러를 사서 읽습니다. 많이 팔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이 되어 있기도 하고, 현재 업이 이렇다 보니 순위에 올라와 있는 책은 꼭 한번쯤 사서 봐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기도 해요.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잘 팔렸지를 생각하고, 얼마나 매력적인 카피를 썼길래 독자들이 사랑하고 있는 거지?를 알고 싶은 욕심이 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구매해서 읽는 책들을 꼭 사서 읽으며 일에 관해 학습을 하는 편이에요.
🦒기린(마케터, 8개월차)
책만큼은 제 직업에 관해 생각하지 않고 구매를 합니다. 현재 직업을 생각하고 책을 바라보게 되면 점점 독자의 시점과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 같기 때문이에요. 독자의 시점을 모르는 채로 책을 구매하게 되면 프레임 안에 갇히게 될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항상 독자의 마음으로 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구매 전엔 제목을 먼저 보고 꼭 5페이지 이상은 읽어본 후 마음에 들면 구매하고 있어요.
책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은 다를지언정 책이 가진 진정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여태까지 책의 진정성을 흐린눈 하고 있었다면 우린 이 업을 선택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