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소련: 냉전 체제의 형성
18세기 계몽주의 이후로 서양 사회는 인류가 이성의 힘으로 끝없이 진보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19세기의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겪으며 이러한 믿음은 구체적인 이념으로 발전했어요. 의회 민주주의와 법치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그리고 노동자들의 권리와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가 그것이었죠.
두 사상은 서로 반목하기도 했지만,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어요. 정치적으로는 민주적인 제도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었죠. 반면, 나치즘을 비롯한 파시즘은 개인의 자유보다 전체를 중시하고 특정 인종의 안위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계몽주의의 가르침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죠. 이런 맥락에서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2차대전을 자유주의-사회주의의 동맹과 파시스트 세력의 싸움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전쟁은 자유주의-사회주의 동맹의 승리로 끝을 맺었죠. 하지만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대변하는 미국과 소련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부터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은 자신이야말로 히틀러를 무너뜨린 장본인이라고 생각했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받기를 원했어요. 자국과 유럽 동부에서 사회주의 실험을 계속 이어가려 했죠. 반면, 미국은 소련에게 주도권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세계경제를 이끌어갈 생각을 지니고 있었고 그러려면 사회주의의 확대를 막아야만 했죠.
미국이 사회주의의 확대를 두려워했던 데는 근거가 있었어요.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기간 동안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을 주도했습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특히 활발했죠. 이 활동으로 얻은 시민들의 지지가 꽤나 두터웠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서는 정권을 차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소련이 동부 유럽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가자,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1947년에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합니다. 미국이 앞장서서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겠다는 선언이었죠. 위기감을 느낀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투표로 당선된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쿠데타로 끌어내리고 베를린을 봉쇄하는 등 자신의 지배권을 지키기 위한 강박적인 조치를 내렸습니다. 미국은 이탈리아 선거와 그리스 내전에 개입해 사회주의자들의 집권을 막았고요. 이러한 과정에서 양국의 대립은 전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죠.
1949년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중화민국의 국민당을 몰아내면서, 미국은 더 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봉쇄하려는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북미와 서유럽의 군사기구인 나토가 설립되었고 미국의 국방예산이 네 배로 늘어났어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냉전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스탈린을 찾아가 전쟁을 지원해달라고 거듭 요청했고 소련의 승낙과 중국의 지지를 받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던 것이죠. 미국을 위시로 한 자유주의 국가들은 남한이 사회주의 세력권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지원군을 파병했고요. 전쟁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휴전 상태로 끝나게 되죠.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중심으로 한 미국과 소련의 군비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세계의 사람들은 핵전쟁으로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게 되었죠. 역설적으로 핵무기의 파괴력은 미국과 소련으로 하여금 전면전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억제력을 지니기도 했어요.
이렇게 형성된 냉전 체제는 대규모의 군비경쟁, 세계 각국의 정치에 대한 양국의 개입, 핵의 위협 등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몇 번의 화해 노력이 있었지만 이러한 대립은 소련이 무너지는 1991년까지 계속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