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위를 배제하라, 노자(老子)
여기서 문제! 노자는 왜 노(老)자일까요? 정답은 바로 그가 ‘늙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그런 답이 있는 건가 싶은 분도 있겠지만, 설화에 따르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늙은 채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늙어서 태어난 사람, 노자
때는 기원전 600여 년경, 중국 초나라 어느 지방에서 한 여인이 자두나무(李樹)에 기대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떨어지는 별을 보며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는데요. 그 후 62년 동안 임신해 있는 상태였다고 하죠.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했고, 머리카락은 눈처럼 희었습니다. 그는 주위에 심어져 있는 자두나무를 가리키며 “나는 이 나무를 따서 성을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곤 자두나무의 이李와 자신의 큰 귀를 상징하는 이耳를 붙여 스스로 이름을 이이(李耳)라 붙였죠. 하지만 하얀 머리칼을 본 사람들은 그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바로 늙은 하늘의 아들이란 의미란 노자(老子)라고 말이죠.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160세 또는 200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혹자는 그가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 또는 공자보다 연장자이며, 공자가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다고 하기도 했죠. (덧붙이자면 최근의 연구자들은 노자를 공자의 훨씬 뒷시대 인물로 추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
그는 이후 주나라에서 왕실의 장서 관리를 맡아보는 수장고 관리로 40여 년을 근무했다고 합니다. 일하는 동안 자신의 재능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고 하죠. 공자와 노자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시기도 이 즈음입니다. 노자는 예를 묻는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군자는 때를 만나면 나아가서 벼슬을 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뒤로 물러나 숨어야 하는 것이오. 내 일찍이 듣기를 ‘훌륭한 장사꾼은 귀중품을 감춰놓은 채 아무것도 없는 듯이 행동하고, 완전한 덕성을 갖춘 사람은 겉으로는 다만 평범한 사람으로 보인다.’라고 했소. 그러니 그대는 몸에 지니고 있는 그 교만과 욕심과 위선 따위를 다 버리시오.
하지만 재능은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 노자는 쇠퇴하는 주나라를 떠나려 길을 가던 도중 국경을 수비하던 윤희(尹喜)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노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세상을 피해 숨어 지내기 전 자신에게 책 한 권만 남겨달라고 애원합니다. 고심하던 노자는 상하 양편의 총 5000여 자로 이뤄진 책을 남기고 그곳을 홀연히 떠났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도덕경>, 독일의 철학자 슈테릭히는 “세계에 단 세 권의 책만 남기고 모두 불태워버려야 한다면, 이 책만큼은 반드시 그 세 권 가운데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죠.
인위를 배제해야 다가설 수 있는 실재
그렇다면 노자는 후대에 어떤 사상을 남겼을까요? 노자는 유가를 비롯한 여러 제자백가가 내세운 명분주의와 인위적인 조작에 반대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입장을 취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무위란 행함(爲)이 없음(無)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인위적인 제도나 노력, 질서 등을 실행하지 않음을 의미하죠. 또한 자연이란 세상 만물의 도와 진리를 품고 있는 궁극적인 실재를 의미합니다. 즉, 무위자연이란 인위적인 제도나 노력을 배제함으로써 궁극적 실재인 자연에 다가설 수 있음을 의미하는 표현이죠.
노자는 그릇의 비유로 무위자연을 설명합니다. 우리 일상 생활에 그릇이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담기 위해 그릇을 사용합니다. 물이 가득찬 잔에는 더이상 물을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죠. 때문에 그릇에는 반드시 빈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는 이러한 이치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수레바퀴에는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의 통에 모여 있긴 하지만 그 가운데가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수레를 사용할 수 있으며, 또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 때 그 빈 곳이 있기 때문에 그릇을 쓸 수 있으며, 문과 창문을 뚫고 방을 만들되 그 가운데가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방을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유(有)가 이용되는 까닭은 무가 작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더불어 그를 비롯한 도가 사상가들은 세상에 만물이 존재하므로 만물을 생성케 하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여겼는데요. 이를 도道라고 칭함과 동시에 ‘이름 붙일 수 없는 것無名’이라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도란 이름 없는 이름입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될 수 없지만,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억지로 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죠. 노자는 이러한 도, 즉 무명이 천지의 시초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비어있는 그릇의 쓸모처럼 만물의 근원은 이 도이며, 이것이 우리 주변의 사물 등 ’이름 붙은 모든 것(有名)’의 근원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죠.
노자는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무위자연의 이치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 ‘억지나 강제를 피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는 인간의 과도한 행동이 ‘하지 않음 만도 못한’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습니다.
뱀은 본래 다리가 없다
그 예로 사족(蛇足)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일꾼들에게 술을 주었습니다. 일꾼들은 술의 양을 보곤 여러 명이 마시면 부족하니 땅에 뱀을 그려 먼저 이를 완성한 사람이 모두 마시기로 했는데요. 한 사람이 “나는 뱀의 다리도 그릴 수 있다”며 한 손에 술을 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가 그리던 도중, 다른 한 사람이 뱀을 다 그리곤 “뱀은 본래 다리가 없다. 그대는 어찌 없는 것을 그리려 하는가?”라며 그 술을 빼앗아 마셔버렸죠.
정치 이론 역시 이러한 입장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는 올바른 통치자의 임무란 인위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즉, 쓸데 없이 법을 많이 만들거나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하기 보다는, 말 없이 담담하게 자신의 덕을 펴 나가는 것이 통치자의 임무라고 보았던 것이죠. 그는 이를 위해 적은 나라, 적은 백성을 이상 사회로 제시했습니다. 인위적인 도덕이나 괜한 지식욕을 채우려 하지 않고 소박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이라는 것이죠.
노자의 철학은 이후 미신, 불로장생법 등을 말하는 사기꾼들의 말과 뒤섞여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혼란했던 정국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고, 개인은 물론 사회 전반의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에서 분명 사상적 가치를 인정 받을 필요가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