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주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의 개막
미국의 기업가 핸리 포드는 1차대전을 전후로 한 시점에 기업과 노동자가 맺을 수 있는 새로운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두 세력이 국가의 개입이 없어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값비싼 교통수단이었던 자동차를 처음으로 대중화시켰던 포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양자가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포드의 힘은 자동차를 빠르고 싸게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자동차 부품을 규격화시키고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조립하도록 해, 튼튼하면서도 저렴한 자동차를 생산했던 거예요. 포드는 각각의 부품을 숙련된 노동자들이 만들어 별도의 조립 공정을 거쳤던 기존의 생산방식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매뉴얼화된 노동과 조립 도구를 활용하면 비숙련 노동자라도 훌륭한 자동차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죠. 지금에야 이 전략이 뻔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변화였습니다. 포드는 자동차 한 대가 만들어지는 시간을 장장 12시간에서 단 30분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어요.
포드는 늘어난 생산량에 맞추어 자동차를 소비할 수 있는 사람도 늘어나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실제로 포드는 노동자들에게 하루 일당을 5달러나 지급했는데, 이는 당시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의 두 배에 달하는 액수였습니다.
이러한 포드의 사상은 ‘포드주의’라고 불리었고, 이는 19세기 미국인들을 괴롭혔던 노동자와 기업 간의 갈등을 해결할 새로운 이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복지 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해요. 여하튼 포드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1920년대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서 포드가 예수와 나폴레옹 다음으로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꼽힐 정도였어요.
하지만 포드가 높은 임금을 지불해야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포드 공장에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규격화된 노동을 수행해야 했던 노동자들은 그것을 쉽게 견디지 못했습니다. 공정을 모두 포드주의에 맞추어 전환한 이후로 퇴직률이 엄청나게 올라갔어요. 포드는 일 년에 세 번에서 네 번은 공장의 전체 근로자 수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을 새로 고용해야 했습니다. 이건 매우 비효율적이었고 포드는 임금을 올리는 대신 노동자들이 무조건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시간을 일해야 한다고 못박았던 거였죠. 포드는 회사에 ‘사회부’를 설치해 전직 복싱 선수들을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업무에 게으른 직원들을 감시하고 노동조합을 입에 담는 직원들을 조용히 불러내 구타하도록 했어요.
생산과 소비의 증대로 자동차는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라 보편적인 상품이 되었습니다. 1차대전 이전에 유럽 전역에는 자동차가 40만대에 불과했지만, 1930년에는 미국에서만 2650만대의 자동차가 굴러다녔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새롭게 태어난 자동차 시장을 석권한 것은 포드가 아니었어요.
1920년대 미국 자동차 시장의 절반은 제너럴모터스가 차지했고 포드의 시장 점유율은 20% 미만으로 떨어집니다. 이 차이는 제너럴모터스가 소비자들에게 제공했던 금융 서비스에서 비롯되었어요. 바로 구매자들에게 신용을 미리 빌려주고 자동차를 사도록 하는 할부 구매였죠. 제너럴모터스는 체계적인 기업조직을 만들어 생산뿐만 아니라 금융사업까지 운영하는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포드는 이 전략을 따라가지 않았어요. 반유대주의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즐겨하는 돈놀이를 악한 것으로 믿었거든요. 대신 포드는 자동차를 구매하려 하는 고객에게 저축통장을 개설해주고 자동차를 살 금액을 수년 동안 모으도록 했어요. 누가 이겼을지는 자명하죠?
포드는 이처럼 모순과 아이러니로 가득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포드주의의 등장은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 변화, 대중을 위한 시장의 형성 등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차대전에서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받지 않았던 미국은 이러한 동력을 기반으로 삼아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