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는 애초에 조선인들에게 정상적인 근대 교육과정을 이식할 생각이 없었고, 조선인들은 ‘보통’의 교육과 그 언저리의 교육을 받으면 그만인 존재였습니다.
3.1운동 이후 조금 넓어진 듯 보이는 교육의 기회는 그야말로 허울 뿐인 것이었고, 여전히 조선인은 일본인과는 다른 교육환경에 노출되어야 했습니다.
식민지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선에서의 교육은 ‘공부’ 그 자체가 아니라 상급학교로의 진학‘만’을 의미할 뿐이었고, 이로써 조선인에게 교육은 그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한 장 읽기
당신이 그 사실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한국은 교육에 단단히 미쳤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런 현상을 일컬어 ‘교육열’이라고 부르죠. 한국 사회의 ‘교육열’은 단순히 ‘교육’ 자체에 대한 열의라고만 하기에 부작용이 너무 큽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교육에 목숨을 거는 걸까요?
조선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이에 따라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바로 이 그 시절, 태어난 신분에 따라 본인의 지위와 계층이 결정되던 사회는 무너졌습니다. 능력만 있으면 경쟁을 거쳐 원하는 지위를 획득하는 일이 ‘형식상’으로는 가능해졌죠.
바로 이때부터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새로운 배움, 즉 근대교육을 수료했다는 ‘학력’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한국의 ‘교육열’이 출발합니다. 근대적 교육기관에 입학하는 것이 계층 이동의 필수적 과정으로 굳어지게 되면서부터죠.
하지만 1910년 국권 피탈은 조선인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을 한순간에 짓밟아 버렸습니다. 일제는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을 만들어 기존 조선의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계몽운동’의 성격과는 전혀 결이 다른 교육정책을 입안하게 되었죠.
그렇게 만들어진 제1차 교육령의 핵심은 식민통치에 복종하고 최소한의 사회적 능력을 갖춘 한국인을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 많이’ 배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인은 보통학교(4년제)을 거쳐 고등보통학교(4년제)를 다니게 되었고 교육내용도 실업교육 위주였죠.
시작부터 비뚫어진 교육과정이었지만, 조선인은 그 왜곡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각종 임용시험이나 전문직이 되기 위한 시험 등에서 요구되는 학력 사항은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근대 직업을 얻기 위해서는 일제가 만든 ‘정규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조에 적응하기 시작한 조선인들은 점점 더 보통학교로 진학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상급 학교로의 진학에 대한 욕구도 쌓여가기 시작했습니다. 공부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학생이 되어야만 했던 겁니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교육은 그렇게 조금씩 병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인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해줄 의지도, 교육받은 조선을 제대로 대우할 의지도 없었습니다. 불만은 누적되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누적된 불만을 해소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교육의 변화도 이때와 맞물리게 되죠.
그렇게 제2차 조선교육령이 반포됩니다. 조선에서의 ‘학제’를 일본과 비슷하게 맞췄고, 교과 내용도 실업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납니다. 하지만 민족 간 차별은 여전했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학교는 따로 운영되었고, 민족별로 입학정원을 따로 두어 공정한 경쟁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럼에도 안정된 삶을 염원한 많은 조선인은 교육을 통한 학력 자본 획득에 매진해 나갔습니다. 회사에서는 사원 간 등급을 나누고 그 구분점을 학력에 뒀고, 등급마다 월급에도 차이를 뒀습니다. 좁디좁은 그 자리를 위해 조선인은 더욱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상급학교로의 진학에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중등학교 입시는 ‘입시의 꽃’으로 불리며 가장 불꽃튀는 경쟁을 보였습니다. 1937년을 기준으로 전국 평균 6대 1을 넘었고, 서울 시내 학교는 대부분 10대 1을 상회할 정도였습니다. 이제 겨우 13~14세 무렵의 아이들이 살인적 입시 경쟁에 내몰리게 된 겁니다.
심지어 그들이 향할 수 있는 조선 내의 고등교육기관은 단 하나, 경성제국대학뿐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비정상적 교육환경이었죠. 이는 곧 중등 교육기관을 ‘대학입학 준비기관’으로 전락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사립학원이나 강습소, 가정과외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조선에서의 심각한 입시경쟁은 일본, 정확히는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심각한 현상이었습니다. 조선인에게 교육이 입시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면서 일제가 교육을 통해 강조하려던 ‘황국신민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된 겁니다.
게다가 조선인 고급인력이 양산되는 건, 그 자체로 ‘조선인 엘리트’의 양산을 의미했습니다. 배운 사람이 적당하면 사회를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제대로 된 사회체제도 갖추지 못한 환경에서 배운 사람‘만’ 많아지면 그들은 곧 사회의 적대 세력이 되어버리죠. 조선총독부의 시선에서 이들은 ‘위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위협은 곧 전쟁이라는 파도 속에서 한 풀, 아니 완전히 전복됩니다. ‘국가총동원체제’의 시작이었죠. 곧 교육 전반에 대한 전면적 통제로 이어졌습니다. 일제는 생산력 극대화를 위해서 조선의 학생들을 신속히 전쟁에 동원할 수 있도록 교육정책을 뒤바꿔 버리죠. 고등교육은 점점 더 억제되고 통제되었습니다.
그 상태로 맞은 해방이었습니다. 미친듯한 교육에 대한 열망은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상황에 억눌려져 있었죠. 때문에 해방과 동시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교육체제의 수립은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새 나라의 교육은 해방 이전의 ‘식민교육’ 시스템을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근대적이고 주체적인 인재를 만든다는 원대한 목표 속에서 다시 기획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36년의 긴 시간 속에서 이미 형성되어버린 비뚤어진 ‘교육열’을 정상화하기란 쉽지 않았죠. 여전히 한국은 교육, 아니 입시에 미쳐있고 ‘교육 정상화의 노력’은 여전히 유효한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