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No.1” 중국과 대만은 어떤 관계일까?

이른바 ‘양안관계’에 대해서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던 날, 아시아의 여러 나라 언론에서는 뜬금없게(?)도 중국의 태도에 주목했다. 물론 러시아의 우방으로서 중국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두고도 주목되는 바가 있었겠으나,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대만이다. 정확히는 중국이 앞으로 대만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지에 주목한 거다.

아니나 다를까, 중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기자회견에서 “대만은 중국 영토의 일부분으로 대만 문제는 중국 ‘내정’ 문제지만, 우크라이나 문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국가’ 간의 분쟁”이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대만은 중국 땅이니까, 군을 움직여도 전쟁이 아니야’라는 거다.

그렇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중국과 대만의 관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는 다르다. 당연히 두 관계 사이의 역사도 맥락이 다르다. 당연히 왕이 외교부장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이야기도 아니다. 문제는 그래서 중국과 대만의 관계, 이른바 ‘양안관계’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양안 관계에는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냉전의 찌꺼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 찌꺼기를 이용해 대만을 무력으로 장악하려 하고 있다.

복잡하다. 이 복잡한 양안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두 나라 사이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대만이 나라였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는 일단 ‘대만’을 독립적인 국가로 간주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예로부터 애매했던 ‘타이완섬’

잠깐 대만이라는 표현보다는 ‘타이완섬’이라는 표현을 쓰자. 이후 대만, 그러니까 중화민국이 만들어지기 전까지의 역사는 전혀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타이완섬’은 아주 옛적부터, 그러니까 중국이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하는 중국 역사의 시작부터 중국사에 포함된 섬은 아니었다.

원래 대만에 살던 원주민 집단은 말레이 폴리네시아계의 민족(지금의 고산족)이었다. 본격적으로 중국 대륙과 관계르 맺기 시작하는 명나라 이전까지는 원주민끼리 살아갔다. 이때만 해도 별도의 국가를 형성하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고, 섬 안에서도 부족마다 따로 떨어져 생활하며 살았다.

한때 타이완섬은 원나라 시절 잠깐이나마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명나라가 들어서고 ‘해금정책(해상무역이나 어업 등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타이완섬’의 해양무역은 쇠퇴한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이 시절부터 대만에는 적게나마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한족들이 소수 정착하기도 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명나라 시절까지도 ‘타이완섬’은 딱히 중국에 세워진 여러 왕조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나라도 아니었고, 역사적으로 끈끈한 사이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오히려 대만에 깊은 관심을 가진 나라는 유럽인들이었다. 바로 17세기 대항해시대의 유럽 말이다.

포르투갈의 항해사들이 유럽인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타이완섬’의 존재를 알아챘고, ‘일랴 포르모자(Ilha Formosa)’, 즉 ‘아름다운 섬’이라는 명칭을 붙여줬다. 이후 포르투갈 상인들은 ‘타이완섬’의 원주민, 그리고 일부 한족들과 교역을 시작한다. 그러던 1624년, 네덜란드가 이 섬에 매력을 느껴 거점으로 삼으면서 원주민 부족들과 한족들을 노예로 착취하기 시작했다.
이후 스페인 역시 ‘타이완섬’ 내에 네덜란드가 차지하지 못했던 일부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고, 불법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타이완섬’에서는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섬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1642년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타이완섬’에서 몰아냈다.

그렇게 네덜란드는 대만 섬 전부를 점령하고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를 시작한다. 그렇게 ‘타이완섬’에 자리를 잡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농사를 위해 광둥성 등지에 사는 한족들을 모집하고 대만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이때 일부 한족들이 대만에 정착하면서 현재 대만의 ‘본성인’이라는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만만의 독특한 혈통이 형성된 거다.

안 그래도 애매했던 중국 대륙과 ‘타이완섬’ 사이의 관계는 청나라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더욱 꼬이게 된다. 명나라 말기 청나라에 밀려 대륙의 남쪽까지 쫓겨나 ‘남명’으로 위축되었을 무렵, 명나라의 군인 정성공은 “항청복명”의 구호를 내걸고 1661년에 뜬금없이 대만에 있던 네덜란드 세력을 침공해 이듬해 네덜란드 세력을 대만에서 축출하고 대만을 장악한다. 아들 정경에 이르기까지 대만을 통치하던 정씨 부자는 곧 몰락했지만, 바로 이때 처음으로 ‘타이완섬’에 사실상의 중국계 국가가 건설되었던 거다.

이때부터 중국 대륙에게도 ‘타이완섬’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청나라에 의해 몰락한 정씨 세력 때문에 졸지에 ‘타이완섬’은 청나라의 영토에 편입되어 버린다. 하지만 청나라는 정씨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목적이었지 대만을 직접 통치하기 위한 편입은 아니었다. 청나라의 관할 아래는 두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통치를 하지 않는, 애매한 관계가 계속되었다.


돼지가 가고 개가 왔던 그 날

그런 청나라와 ‘타이완섬’ 사이의 애매모호한 관계가 확실히 정리된 건 19세기 후반이 되면서부터다. 정확히는 ‘서구열강’과 일본의 군사행동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부터다. 청나라는 이 시기 ‘타이완섬’을 본인들의 ‘방어’의 거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후 1885년에 처음으로 ‘타이완섬’을 푸젠성에서 분리해 ‘타이완성’으로 승격시킨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절 중국은 ‘종이호랑이’였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대만을 일본에게 할양하게 된다. 이후 일본 제국은 대만 총독부를 설립하고 식민통치를 시작한다.

그런데 조선과 다르게 대만은 조금 특이한 식민지 경험을 하게 된다. 애초에 ‘타이완섬’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명확한 ‘국가 정체성’이 확립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기존의 중국 왕조와의 애매한 관계에서도 드러나다시피 그들은 이미 이민족의 지배에 어색함이 적었다. 게다가 청의 무관심 속에서 제대로 된 산업의 발전이 있었을리 만무했던 ‘타이완섬’은 일본 식민지시기의 ‘근대적 발전’이 놀라웠다. 이전의 네덜란드, 청나라보다 상대적으로 체계적이기까지 했다.


물론 결국은 일본 제국의 대만 통치는 식민 지배였다. 당연히 일본군에 의한 폭력적인 ‘학살 사건’도 있었고, ‘타이완섬’의 원주민들이 일제 식민 지배에 항거를 하기도 했다. 어떤 세상에서도 식민지배가 ‘아름다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1930년대 이후부터는 동아시아 전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고, 대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일본은 패전했고, 대만의 식민 지배도 끝이 났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이른바 ‘양안문제’는 일본 식민지배가 끝나는 순간부터 본격화된다. 냉전의 시작이었다. 일본이 물러간 ‘타이완섬’에 국민당이 이끄는 중화민국 군인들이 진주하게 된 거다. ‘타이완섬’ 주민들은 새로운 통치자가 온 것이었다. 정복자의 자세로 섬을 장악한 국민당 군인들이 ‘타이완섬’ 주민 입장에서 달가울 리 없었다. “돼지가 가니, 개가 왔다”는 웃지 못할 속담까지 생겼다. 일본인들은 돈 욕심‘만’ 많았는데, 국민당은 그 이상이었다는 말이다.
국민당 군대와 ‘타이완섬’ 주민 사이의 갈등은 결국 1948년 2월 28일에 2.28 사건으로 극에 달했고, 주민들은 학살 수준의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이 와중에 중국 본토에서는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 사이에서 국공내전이 한창이었다, 1949년 패색이 짙어진 국민당과 총통이었던 장제스는 마오쩌둥이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대규모 군과 지지세력을 이끌고 ‘타이완섬’으로 도망가 타이베이를 임시 수도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중화민국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후 중화민국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대만을 안정적으로 성장시킨다. 하지만 그 성장은 엄연히 독재와 폭력으로 기존 원주민 집단을 억압하는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민진당

역사적인 과정을 살펴본 것처럼, 현재 중국은 중국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섬, 그러니까 대만의 중화민국으로 갈라져서 시작된 독특한 과거가 있는 관계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중화민국을 만든 ‘국민당 정권’의 폭력적인 ‘침략’이다.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양안관계’니 ‘일국양제’를 떠든다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웃긴 건 국민당 정부와 중국 정부는 서로의 존재 자체를 자국의 국토를 불법적으로 점거한 단체로 간주해왔다는 사실이다. 마치 한국과 북한처럼 말이다. 냉전이 만들어 낸 개그다.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켜 원래 ‘자국 영토’였던 중국 대륙을 불법 점거 중이라고 하고, 중국 공산당은 ‘타이완섬’에 있는 국민당이 국공내전으로 패전한 ‘없어진 나라’ 중화민국을 참칭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문제는 대만에는 중국과는 다르게 국민당이 아닌 세력, 정확히는 새로운 정당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1986년 이전까지 일당 독재 체제를 유지하던 중화민국은 1986년 민주화 이후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토착 정당인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이 결성된 거다.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합법적인 정당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민진당은 청년층이나, ‘본성인’의 지지를 받으며 점차 세력을 불려 나갔다. 그렇게 민진당은 2000년 이후 8년 동안 천수이볜 총통이 이끄는 중화민국의 집권 여당이 되었고, 2008년 1월 총선에서 국민당에 패배했다가 2016년 총통 선거에서 56.3%에 득표율로 차이잉원이 당선되면서 재집권에 성공한다. 더불어 총통 선거와 같이 치른 총선에서도 총 113석 중 68석을 차지하면서 승리를 따낸다.

그렇다. 이제 문제는 중화민국의 국민당과 중국의 공산당 간의 자존심 싸움이 아니란 말이다. ‘냉전의 찌꺼기’를 넘어 ‘타이완섬’의 독립, 즉 대만의 독립을 열망하는 새로운 정치집단과 그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과반 이상의 대만인들이 있다는 말이다. 이들은 ‘타이완 민족주의’를 정치적 이념으로 내걸고 ‘국민당 정부’가 지금껏 ‘타이완섬’을 불법적으로 점령했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중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시진핑은 ‘언제든지 대만을 공격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고, 실제로 대만과 가장 가까운 난징군구에 병력을 집중시키면서 대만에 대한 군사적 도발을 이어가고 있다. 이 상황에서 대만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사실 몇 없다. ‘냉전의 찌꺼기’를 넘어서기 위한 대만이 손을 벌려야 하는 나라는 아쉽게도(?) 러시아, 중국과 냉전의 다른 축을 담당했던 미국이다. 그렇게 중국의 도발에 대만은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굳건히 하며 미국으로부터 공격형 무기들을 도입해 군비를 증강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다음은 대만인가?

2020년에 들어서면서 중국과 대만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차이잉원과 민진당은 ‘중화민국’을 부정하고 ‘양안관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대만은 대만이지’라는 거다. 2020년 부총통 라이칭더는 “중화민국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할 정도로 강경한 ‘대만 독립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중국과 대만의 관계는 앞으로 더욱 오리무중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을 때 주변 국가들이 중국을 쳐다봤던 건 바로 이러한 두 나라 사이의 관계 악화 때문이기도 했다.

이 글을 쓴 이유가 중국인들을 화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테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대만은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중국과는 전혀 다른 역사적 과정을 밟아온 곳이다. 오히려 중국으로부터 착취 받거나, 억압당했던 곳이라고도 볼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여전히 많은 대만인은 중국인이 아니라, 스스로를 ‘타이와니’, 그러니까 대만인으로서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거다. 이건 그 누구라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다.

이 사실을 한국인들에게 더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이미 100년 전에 겪었지 않았나 말이다. 한국인들은 역사교육을 통해 원치 않게 정체성을 빼앗겼던 그 날의 치욕을 기억한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하는 것이 있다.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남다른 의지다. 남들이 뭐라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을 때 대만은 난관을 이겨낼 것이다. 대만의 ‘앞으로’를 응원한다. 이건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간섭이 아니다. 이건 그저 인류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