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통일, 삼국통일일까? 이국통일일까?

용맹한 고구려! 강대국과 싸워 모두 이기다!

삼국의 항쟁이 한창일 때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했습니다(589). 이후 고구려는 새롭게 등장한 중원왕조와 자웅을 겨루기 시작합니다. 신라로부터 한강유역을 빼앗긴 와중에 통일된 수나라로부터 지속적인 압박을 받자, 고구려는 일단 먼저 북방으로 시선을 두고 수나라에 집중합니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유명한 전투들이 바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입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합니다. 이후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하면서 결국 멸망합니다.

이후 중원은 당나라가 평정합니다. 당은 초반에 고구려에게 유화정책을 폈으나,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집권하고 대당강경책을 펼치자 입장을 바꿉니다. 연개소문은 당시 왕이었던 영류왕과 그 반대파들을 죽이고 정변을 통해 실권을 잡았어요. 이에 당은 영류왕의 복수를 갚고 연개소문을 단죄한다는 명분으로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당은 수차례 고구려와 싸웠지만 안시성전투(645)에서 크게 패하고 뒤이은 몇 번의 공격도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강대국들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국력을 많이 소모한 고구려는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혼란해지기 시작했어요.

신라와 당의 거래 : 고구려와 백제 땅은?

고구려가 수·당과 격전을 벌이는 동안 신라의 배신으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된 백제와 신라는 크고 작은 전투를 계속했어요. 그 와중에 수·당과 전쟁을 치르던 고구려가 백제를 전략적 파트너로 삼아 신라를 견제하려고 했어요. 신라가 한강유역을 전부 차지했기 때문인 것이죠.

백제는 지난날 관산성전투를 생각하며 신라를 힘껏 공격했고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딸이 그 남편과 함께 죽게 됩니다(642). 다급해진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이윽고 당나라와의 외교에 필사적으로 나섰습니다. 이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곧 백제로 진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면서 결국 백제를 멸망시킵니다(660).

나당 연합군은 이후 고구려로 발길을 돌립니다. 고구려는 초반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연개소문 사후 세 아들간의 권력쟁탈로 지도층이 분열됩니다. 이후 나당연합군이 이 틈을 이용하였고, 결국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도 멸망하게 됐습니다(668).

처음에 신라가 당과 거래를 할 때,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갖겠다고 서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니 당이 이 약속을 무시하고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흑심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을 결정합니다. 이후 신라는 매소성과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676) 당을 패퇴시켰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면서 통일을 이룩하게 되지요.

신라의 통일에 대한 평가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어요. ①영토상으로 대동강 이남의 통일에 그쳤기 때문에 고구려의 옛 영역을 잃게 되었다. ②당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통일이다. ③그러나 결국 당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했다는 점에서 자주성을 인정할 수 있다. ④통일을 통해 삼국의 문화가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우리가 배워온 삼국통일 혹은 신라통일의 내용과 의의 및 한계입니다.

① 삼국통일? 노노 이국통일!

A : 전쟁 결과를 봐. ‘삼국통일’이 아니라 ‘백제통합전쟁’이지. 또 신라는 ‘답설인귀서’에서 보이듯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을 갖겠다고 했으니 애당초 목적에서부터도 3국통일이 아니라 2국통일이라고 봐야 돼!

B : ‘평양이남’이란 말 안에 고구려 땅도 포함되는데 무슨 소리야? 그리고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당과 전쟁을 한 걸 보면 애당초 백제만 통합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꾸준히 고구려의 옛 땅을 탈환하고자 했던 거 몰라?

A :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 땅이 비율상 미미해도 너무 미미해. 이걸 어떻게 삼국통일로 보겠어?

B : 결과만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신라 조정 내에서 분명 통일국가임을 내세우려는 논리가 있었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그것이지.

② 통일신라? 노노 남북국시대!

A  : ‘신라통일’이라고 해서 한국사의 무대를 한반도로 국한하고 발해사를 배제하려는 건 만선사와 식민사학의 소산이야. 여기에 고구려는 포함되지 않았잖아. 그냥 신라 삼국통일론에 집착하지 말고 차라리 백제통합전쟁임을 인정해. 고구려 옛 지역에 바로 발해가 들어섰으니 ‘남북국시대’로 보면 되는 거야. 신라통일을 강조할수록 발해의 위치가 한국사에서 좁아져. 삼국통일을 강조하면서, 발해도 우리 역사라는 이중선은 논리에 맞지 않아.

B : 역사는 당위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의 세계야. 발해를 한국사 체계에 녹여내기 위한 목적으로 신라삼국통일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아. 그리고 식민사학의 논리적 허구성은 ‘반도결정론’이라는 그릇된 인식에서 출발했다는데 있는 거야. 발해사를 한국사에 귀속시켜 우리 역사무대가 한반도 바깥까지 미쳤다는 것을 내세움으로써 타파되는 게 아니라고.

③ 통일신라 개념은 근대 역사학의 발명품이야

C : ‘통일신라’라는 개념은 신라인들부터 ‘일통삼한’ 이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있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근대에 들어와 발명된 거야. 오늘날의 신라통일론은 백제, 고구려의 멸망을 기준으로 하는 전통시대의 일통삼한론 또는 신라정통론이 아니라, 나당전쟁을 거쳐 당 세력을 축출한 676년을 핵심적 기점으로 삼는 2단계 통일론에 입각해있지! 사실 ‘통일신라’라는 것도 없던 말인데, 일본인인 하야시(林泰輔)가 『조선사(朝鮮史)』(1892)를 쓰면서 만들어낸 말이고, 그때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어.
하야시가 애초 나·당의 대립을 강조하는 2단계 통일론을 구상한 것은 당시 청과 일본, 조선의 국제관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 즉 청일전쟁 직전 일본의 대 한반도 정책이라는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아.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맺은 1876년부터 꾸준히 ‘청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켜’ 청의 영향력에서 조선을 떼어내려고 했어. 이것도 마찬가지인거지. 다시 말해 그전까진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있어 청에게 매번 밀렸거든. 조선이 사대주의로부터 탈피해야 국력이 발전한다는 당위를 신라에 덧씌우면서, 신라가 당과 전쟁을 통해 당을 물리친 때야말로 삼국통일의 기준이라고 콕 짚어 이야기했어.
거기에다가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이래 제국 일본이라는 타자를 통해 통일신라의 문화가 세계적 문화로 극찬되고, 곧이어 석굴암의 발견, 금관총, 서봉총의 발굴이 이어지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통일신라’는 조선 문화의 근원이며, 민족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지. 결국 통일신라라는 개념은 근대에 들어와 새로이 만들어 진 것으로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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