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저는 ‘법과정치’ 과목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무수한 사상가들의 원전을 직접 읽어볼 생각은 못했습니다. 수능 위주의 입시에서 원전을 읽는 건 큰 도움이 안 됐죠. 대학에 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같은 책을 처음으로 읽으면서 교과서에 정리되어 있는 몇 줄로 이들의 사상을 이해했다고 믿었던 게 약간 부끄러워졌던 것 같습니다.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

중세의 유럽인들은 한국의 고등학생들보다 훨씬 더 원전에 접근하기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삶을 규정했던 성경조차 직접 읽어본 적이 없었죠. 아주 소수의 성직자들만이 원전을 읽었고 엄청나게 긴 주석을 달아두었습니다. 그 주석들이 곧 교과서가 됐고 모두가 그것만 읽었어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극히 소수였지만요. 하지만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시기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원전을 직접 읽고 다르게 생각해보려 했던 것이죠. 고전시대의 저작과 성경의 원전을 정확한 방식으로 다시 읽으면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가들은 스콜라 철학과 가톨릭 교회라는 중세의 지적 권위에 도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