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의 죽음으로 요동치는 동아시아

아베 신조의 죽음으로 요동치는 동아시아

아베 신조 전 일본 내각 총리가 지난 8일 선거 유세 도중 총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범인은 황당하게도 통일교와 아베 전 총리의 집안이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본인의 어머니가 통일교에 막대한 재산을 헌납한 사실에 화가 나 저지른 ‘외로운 늑대 형’ 테러라는 겁니다.
한편 아베 전 총리의 장례식은 도쿄에 있는 사찰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졌지만 정계에서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모테기 도시미쓰 자민당 간사장, 자민당 최대 파벌인 ‘세이와카이’ 간부 등이 참석했고,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주변에 많은 일본 국민들이 몰려 아베 전 총리를 추모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국장’ 형식의 장례식이 올가을 다시 치러질 예정이죠. 2019년에 사망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를 비롯해 일본의 수많은 전직 총리의 장례식 중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이번 아베 전 총리의 장례가 두 번째입니다. 아베 전 총리의 장례가 국장으로 격상된 건 재임 기간 역대 최장수 총리라는 점도 컸지만, 일본 내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대단히 높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정과 외교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는 겁니다.

아베 전 총리의 일본 내 영향력은 그가 죽고 얼마 뒤 치러진 일본 참의원(상원) 선거 결과에서도 드러납니다. 자민당 등 개헌 추진 세력이 개헌 발의에 필요한 의석수의 3분의 2를 훌쩍 웃도는 의석수를 확보하게 된 것이죠. 이에 기시다 현 일본 총리는 그간 아베 전 총리가 추진하던 평화헌법 개정 추진을 ‘가속화’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평화헌법 개헌 추진이라니, 대체 무슨 말일까요? 단순하게 바꿔 말하면,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탈바꿈하기 위한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선제공격’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명문화’하겠다는 건데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헌법이 개정되는 순간 자위대가 유사시 한반도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일본의 헌법개정 문제에 민감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은 동아시아의 ‘흑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의문이 생깁니다. 대체 왜 아베 전 총리는 살아생전 그렇게까지 일본의 ‘군사력 팽창’에 힘을 쏟았던 걸까요? 그리고 ‘극우주의자’, 혹은 ‘군국주의자’라는 평가까지 받아가면서도 동아시아의 평화를 헤치는 일을 하려 했던 걸까요? 아베 전 총리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뿌리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역할을 했던 그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로부터 출발하는 일본 우익의 뿌리 말입니다.

일본 정계의 ‘로열패밀리’, 아베의 가족

아베 전 총리는 1954년 9월 21일에 태어났습니다. 자유민주당(자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으로 일본 최초의 전후 세대 총리이자, 일본 내 최장기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인물입니다. 일본은 지금도 가업을 잇는 문화가 강력한데요. 특히 정치가 집안은 아버지, 더 넓게는 외가 쪽이라도 정치인이 있다면 지역구까지 물려받아서 정치인이 되곤 합니다.

아베 전 총리는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가 외무대신으로 있을 적에 비서관을 지내면서 정치 일선에 데뷔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급사하자, 아버지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중의원이 되었고, 제37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72대 내각관방장관, 제21대 자유민주당 총재를 지내면서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했죠.

아베의 집안은 아버지만 정치인이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안 자체가 굉장히 화려한 엘리트 정치인 집안이었죠. 친할아버지인 ‘아베 간’의 경우에도 중의원을 지낸 인물이고,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사망 전에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촉망받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사실 아베 전 총리를 수식하는 가장 낯익은 표현은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라는 말인데요. 그만큼 외가 쪽이 화려합니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자민당 체제를 확립한 정치인이자, 만주국 성립에 깊게 관여했던 ‘쇼와의 요괴’로까지 불렸던 정치인이었죠. 게다가 외종조부(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는 아베 이전 최장기간(7년 8개월) 총리를 역임한 사토 에이사쿠로, 그가 총리로 있던 시기가 자민당의 최전성기이자 패전 후 일본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고 평가를 받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독특한 건, 친가와 외가의 정치 성향이 조금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1930~1940년대 만주국에서 주요 요직을 지내며 일본 군국주의를 최전선에서 주도하던 인물이었는데요. 만주국 운영을 사실상 주도했던 인물이면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 활약한 인물로 A급 전범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친조부인 ‘아베 간’은 야마구치현의 대지주 출신으로, ‘반전 평화주의자’ 정치인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1942년 일본이 전쟁 중이던 그 시절, ‘반전’을 외친 몇 안 되는 무소속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당시는 군부의 정책에 협력하는 ‘대정익찬회’ 소속의 중의원이 대부분이었는데, 아베 간은 그런 분위기에서 도조 내각과 전쟁에 반대하는 정책을 주장한 정치인이었습니다.

한편, 아베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아베 간의 아들이었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였다는 이유로 주목받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기시의 데릴사위’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도 했죠. 하지만 아베 신타로는 그런 별명을 대단히 싫어했고 ‘아베 간’의 아들이라고 불리길 원했을 만큼 아버지의 영향이 강한 정치인이었습니다. 평소

“아버지는 익찬회을 적으로 돌리고 금권부패를 규탄했으며, 평생 일관되게 전쟁에 반대하는 자세를 이어갔다.”

라거나

“세계대전은 일본을 망국의 위기에 빠뜨린 매우 잘못된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국제적으로도 이 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는 엄혹한 비판이 있다. 정부도 그런 비판을 충분히 인식하며 대응해가야 한다”

는 전향적인 역사 인식을 가진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베 전 총리는 어렸을 적부터 친가 쪽보다는 외가 쪽의 정치적 사상에 많이 젖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를 두고 일본 내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돌았지만, 내막은 알 수 없는 일이죠. 혹자는 평소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컸고, 외탁해 자라는 과정에서 외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쌓였던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하죠.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아베 전 총리는 학생 시절부터 자신을 아베 간보다는 ‘기시 노부스케의 손주’라고 칭하고 다녔습니다.

그럼 대체 아베 전 총리가 그토록 배우고 싶었던, 그리고 닮고 싶었던 기시 노부스케는 어떤 인물일까요? 대체 그가 만들고 싶었던 일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조금 오래 전으로 시계추를 돌려봐야겠습니다. 기시 노부스케가 정치를 시작하던 20세기 초반으로요.

‘쇼와의 요괴’ 기시 노부스케가 꿈꾼 만주국

기시 노부스케는 1896년 11월 13일,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야마구치현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치의 중심 세력 중 하나인 ‘조슈 벌’의 근거지가 되는 곳이기도 했죠. 우연인지 필연인지, 바로 이곳 출신 중에는 이토 히로부미도 있습니다. 그만큼 메이지 유신 이후 영향력이 있는 일본 정계 인사들을 배출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기시는 1917년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는데요. 대학 시절에는 ‘공부벌레’라고 불릴 만큼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후 그는 대학 3학년 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고, 1920년 도쿄제국대학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농상무성에 들어가 관료의 길을 걷게 되죠. 1925년 상공성에 배속된 기시는 1930년 5월부터 11월까지 베를린에 파견되어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던 ‘산업합리화운동’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기시가 만들어 낸 ‘산업통제법’은 일본의 통제경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법으로 평가받기도 하죠. ‘산업 자유주의를 제한하는 획기적인 입법’으로 평가받는 법입니다.

이러한 기시의 사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기타 잇키’라는 사상가였습니다. 기타 잇키는 1920~1930년대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사상가였습니다. 당시 젊은 일본 대학생 중에서 이 사람에게 꽂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할 만큼 ‘아이돌’과 같은 스타 사상가였죠. 그는 당시 대학생 뿐만 아니라 청년 장교들의 국가개조 운동에 사상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크게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기타 잇키는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이자, 동시에 ‘국가 사회주의자’면서 파시스트였죠.

“황도파”라고 불리던 기타 잇키의 사상에 매료된 청년 장교들이 ‘천황의 친정’, 그러니까 ‘쇼와 유신’을 외치며 벌이는 쿠데타가 바로 1936년에 일어난 ‘2.26 사건’입니다. 바로 이때 기카 잇키는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고, 황도파 군인들은 대부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문제는 바로 이 ‘2.26 쿠데타’가 실패한 쿠데타이면서, 반면에 ‘성공한 쿠데타’라는 겁니다. 주동자들은 대부분 죽었지만, 이 쿠데타의 명분에 감화된 많은 젊은 군인과 관료들이 그들의 꿈을 꾸기 위해 이주하는 공간이 바로 만주국이었기 때문이죠. 기시도 바로 그러한 젊은이 중 하나였습니다.

한편 기시가 주장하던 ‘통제경제’를 현실화할 기회가 열리게 됩니다. 한창 ‘통제경제론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기시가 1936년 10월, 만주국 국무원에 배속되어 만주로 건너가게 된 것이죠. 기시는 이후 1937년에 산업부 차장, 1939년 3월에는 총무청 차장에 취임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기시는 계획경제와 통제경제를 만주국에서 과감하게 실험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한 통제경제의 실험으로 나온 것이 바로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입니다.


기시는 정부가 직접적으로 국가 경계에 개입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대자본 중심’의 재계에 협조를 촉진해야 한다고 바라봤는데요. 그는 특히 위로부터의 국가통제가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 이 ‘통제경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제국 규모’의 경제 규모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였습니다. 바로 그 제국주의적 사고가 그를 만주국 통제경제의 지휘자로 만들어주었던 겁니다.

기시가 만주국에서 ‘통제경제’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자 그의 이름값은 점점 높아져 갔습니다. 다양한 고위급 관료를 비롯해 정·재계에 방대한 인맥을 형성하게 되었죠. 이른바 ‘만주인맥’이 형성된 겁니다. 이러한 경험과 인맥은 기시가 강력한 국가주의 아래서, 개발주의의 유산을 간직한 채로 ‘제국의 경제관료’에서 ‘냉전의 정치가’로 변신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전쟁과 패전, 그리고 펼쳐진 기시의 변신술

기시는 만주국에서의 경험으로 ‘통제경제 정책’에 강한 자신감. 만주를 떠날 때 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은 말까지 했을 정도죠.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만주국 산업개발은 내가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는 한없이 애착을 느낀다. 일생동안 잊지 않을 것이다.”

라면서 말이죠.

한편 기시는 만주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1939년 10월 상공성 차관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옵니다. 만주를 넘어 일본 전역에서 ‘통제경제 정책’을 이끄는 관료가 된 겁니다. 이후 1941년에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으로 취임했고,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 동원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하죠. 본격적인 전범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후 1942년 제21회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현직 상공대신의 지위를 유지한 채 출마했고 이내 당선됩니다. 그렇게 그는 정치가로서도 활동하기 시작했죠. 1943년 전쟁이 격화되자 도조 히데키 내각은 상공성을 군수성으로 개편하고 도조가 군수대신을 겸임하면서 기시에게는 군수차관의 역할을 맡겼죠. 문제는 이때부터 도조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특히 1944년 7월 9일 사이판섬이 미국에 함락되면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기시는 ‘군수차관직’을 걸고 강화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후 도조 히데키 7월 18일에 사직했고,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이 터지며 전쟁은 끝납니다. 바로 이 부분, 그러니까 패전 직전 종전을 주장한 기시의 요청 덕분에 그는 A급 전범으로서 재판을 받았지만, 사형을 면할 수 있게 됩니다.

미군정은 기시에게 신뢰를 보였고, 더불어 그를 활용할 만한 인물로 판단했죠. 그 이유에는 사실 만주국에서의 활약 경험도 있었죠. 만주국, 그리고 만주국을 실제로 운영하던 관동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주도했던 군이 아니라, 사실상 소련과 중공군을 상대로 싸웠던 군대였습니다. 만주국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반공산주의’였고, 미국 입장에서 만주국 관료 출신 기시는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사적인 냉전 구조 속에서 훌륭히 역할을 해낼 인물로 보였던 겁니다.

그렇게 기시는 이후 1952년 ‘자주헌법제정, 자주군비확립, 자주외교전개’를 슬로건으로 한 일본재건연맹을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합니다. 1955년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을 통합하여 자유민주당을 결성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게 되죠. 지금의 자민당 체제를 확립한 인물도 바로 기시 노부스케입니다. 외무상을 거쳐, 1957년 2월에는 자유민주당 총재 겸 총리로 발탁되면서 당대 일본의 최고 정치가로 서게 되었죠.

기시는 자신이 총리로 있는 동안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일본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길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에는 미국과의 경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의 재무장이 곧 미일동맹의 강화이자 동아시아의 안보의 핵심이라는 논리였죠. 미국 중심의 외교 정책을 고수하면서도 군국주의적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유리한 논리이자, 사실상의 궤변이었죠. 냉전 체제에서 미국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우익으로서 역할을 하려다 보니 논리가 빈약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기시가 꿈꾼 나라를 물려받은 아베, 그리고 한국

기시가 꿈꿨던 일본이라는 나라, 그리고 그러한 일본을 위해 선택한 정치적 방향성은 그의 외손자인 아베 전 총리에게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아베의 주장을 곰곰이 살펴보고 있자면 그의 증조부의 그것과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아베가 증조부인 기시의 정치적 후계자임을 강조했던 만큼 두 사람의 사상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기시 노부스케와 아베 신조는 죽었지만, 그들의 죽음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된 느낌입니다. 기시다 현 일본 총리가 말하는 ‘아베 전 총리의 유산’은 곧 일본의 재무장화를 뜻하는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미일동맹의 강화를 의미하기도 하겠죠. 이 가운데서 한국은 어디에 서야 하는 걸까요?

우리는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워왔고, 실천하고 있죠. 아베 전 총리의 죽음으로 요동치는 동아시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겠습니다. 다시는 지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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