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격변의 동아시아, 그 한 가운데 몽골과 고려가 있었습니다. 12세기 말 이래로 세계를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과 무신정권이 권력을 휘어잡고 국왕을 농락하던 고려. 둘은 결국 전쟁을 통해 새로운 외교 관계를 맺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 시기, 이른바 ‘원 간섭기’라고 불리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정리해 봤어요!👀
✍️세 줄 요약
- 13세기 격변의 동아시아, 세계를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과 무신정권이 권력을 휘어잡고 국왕을 농락하던 고려가 만납니다.
- 둘은 결국 전쟁을 끝내고 새로운 외교 관계를 맺는데, 그 관계가를 오늘날 이른바 ‘원 간섭기’라고 부릅니다.
- 원 나라 황실에 기대어 강력한 왕권이 회복된 시기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원세력’에게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시절, 고려는 이 ‘암흑기’를 어떤 외교술로 이겨냈을까요?
📃 한 장 읽기
- 1231년 8월 몽골이 고려를 침공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시작됩니다. 이 시기 고려의 진짜 주인은 고려 국왕이 아니라 무인 집정자 최우였죠. 고려 본토가 쑥대밭이 되는 순간에도 최우는 강화도에 틀어박혀 앉아 있었고, 국왕은 그 상황을 지켜봐야 했죠. 바로 이때 홍차구의 아버지 홍복원이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 홍복원은 1,500호의 고려 백성들을 이끌고 몽골에 투항합니다. 이후 홍복원은 몽골군을 따라 다니며 전투가 치러지는 곳에서 향도 노릇을 자처합니다. 홍복원은 그야말로 몽골인으로 살아 갑니다.
- 몽골의 입장에서 홍복원은 꽤나 쓸만한 인간이었습니다. 몽골은 홍복원을 요양과 심양지역에 정착시키고 함께 온 고려인들과 농사짓고 살게 합니다. 홍복원은 이들을 관리하는 책임자가 되죠.
- 몽골인 홍복원은 몽골의 고려 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몽골군의 맨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약탈을 서슴치 않았으며, 전리품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죠. 이 과정에서 고려인들은 학살당하거나 산채로 몽골에 끌려 갔습니다. 홍복원 입장에서 몽골과 고려의 전쟁은 그야말로 ‘노다지’였습니다.
- 승승장구하던 홍복원의 앞에 엄청난 반전이 펼쳐집니다. 고려 왕족 왕준이 인질로 있는 13년 동안 몽골의 황제 몽케 칸과 가까워졌고 왕준은 몽골의 황실과 결혼까지 하면서 홍복원을 위협합니다. 결국 둘의 갈등 끝에 홍복원은 비참한 죽음을 당합니다. 몽골의 황실을 등에 업은 왕준이 승리를 한거죠.
- 홍복원이 죽고 몽골에서 홍씨 가문의 역할은 끝날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아들 홍차구는 아버지의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몽골과 고려 사이에 화해의 분위기가 돌았지만, 몽골의 입장에서 완벽하게 고려를 믿을 수만도 없었고 곧 홍차구는 심양과 요양 지역의 총관직을 다시 꿰차게 됩니다. 고려를 감시하는 역할을 홍차구에게 맡겼던 거죠.
- 홍차구가 쿠빌라이의 신임을 얻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것이었습니다. 홍차구는 삼별초를 제압함으로써 쿠빌라이의 강한 신임을 얻을 수 있었죠. 홍차구는 삼별초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붙잡은 고려인들을 무참히 포로로 잡아 몽골에 보내버리거나, 노비로 팔아버립니다.
- 홍차구의 막장 짓은 몽골의 일본 원정 과정에서 원정을 책임자는 ‘감독조선관군민총관’가 되면서 벌어집니다. 고려인 기술자와 인부 3만 명을 부리며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던 겁니다.
- 고려 국왕 원종은 이 상황을 역전시킬 한 방이 필요했고, 그가 선택한 건 몽골 황실과 고려 왕실 간의 결혼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려 왕실은 몽골 황실의 부마가 되었고, 몽골 내에서 고려 왕실의 위상은 급격히 상승합니다. 그렇게 쿠빌라이의 사위로서 고려 국왕이 된 인물이 바로 충렬왕입니다.
- 위기를 맞은 홍차구는 다시 상황을 반전시킬 결정적인 한 방을 준비합니다. 고려의 충신이자, 몽골의 일본원정, 삼별초의 난 때 활약했던 김방경이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를 죽이고 몽골에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헛소문’을 이용하려 했던 거죠.
- 쿠빌라이는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충렬왕과 김방경을 몽골로 불러들입니다. 바로 이때, 충렬왕은 참아왔던 불만은 제대로 터트립니다. 충렬왕은 이 한 번의 알현으로 홍차구와 몽골군의 전면 철수라는 외교적 성과를 얻어 냅니다.
- 하지만 충렬왕이 홍차구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이들을 처형시켜 버리자, 홍차구는 다시 쿠빌라이 앞에 나가 “충렬왕이 무엇인가를 꾸미기 위해 몽골의 충신을 죽이고 있습니다!”라고 일러 바치게 됩니다. 쿠빌라이는 다시 충렬왕을 몽골로 불러들였고, 둘은 그렇게 대면했죠.
- 쿠빌라이 앞에서 선 둘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을 펼칩니다. 하지만 충렬왕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듣자 듣자 하니까, 네가 뭔데 고려 조정 일에 일일이 간섭을 하는거야?”라는 묵직한 한 방을 날렸죠.
- 쿠빌라이는 “알았고, 다음부터는 나한테 보고하고 처리해. 돌아가 봐”라면서 상황을 급히 정리해버립니다. 충렬왕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판결은 없었습니다. 사실상 충렬왕과 홍차구의 싸움에서 충렬왕이 확실한 승기를 잡게 된 것이었습니다.
- 홍차구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카드는 몽골의 2차 일본 원정이었지만 이 마저도 충렬왕이 실질적인 총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 입지는 줄었고, 2차 원정마저 실패로 돌아가면서 홍차구는 4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 그들의 자손들도 어떻게든 몽골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황실에 줄을 댔지만, 결과적으로는 몽골 황실의 부마였던 고려 왕실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주변 정세 변화를 기막히게 읽어내는 능력으로 한때 고려 국왕의 권한을 넘보기까지 했던 홍씨 가문은 그렇게 쓸쓸하게 사라져 갔습니다.
- 어떤가요?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해오던 원 간섭기 고려의 모습과는 조금 달라 보이나요? 여전히 고려 왕실의 선택이 그저 ‘치욕적인 반민족적 행위’로만 그려지나요? 외교라는 건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현 상황에서 고려 왕실이 선택한 외교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겁니다.
정리된 이 에피소드 만으로도 재미있는데 본격적인 심화 콘텐츠는 더 더 재미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반전의 한국사》 안정준 저자님과 직접 나눈 이야기들도 준비되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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