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어주는 다리, 양화대교 & 한남대교

꿈을 이어주는 다리, 양화대교 & 한남대교

수백 번은 건너온 이 양화대교가 오늘도 한껏 취한 날 집으로 데려가.
내 꿈에게 작별 인사를 보낼 시간. Good night 홍대. 내일도 다시 만나.
_딥플로우 <양화>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젊음은 피어나는 꽃처럼 이 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다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
_혜은이 <제3한강교>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과 영등포구 양평동 사이를 잇는 다리, 양화대교.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과 강남구 압구정동 사이를 잇는 한남대교. 이 두 다리는 원래 제2한강교, 그리고 제3한강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다리였습니다. 한강의 남북을 잇는 총 31개 다리 중 초기에 만들어진 다리들이죠. 두 다리 사이에만 10개의 다리가 있으니, 사실 둘 사이의 거리는 꽤 멉니다. 하지만 두 다리 사이를 연결해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젊음”과 “꿈”이죠.

젊은이들의 꿈을 연결해주는 다리, 양화대교와 한남대교. 그 두 다리가 생겨나던 그때도 그랬을까요? 그리 멀지 않은 1960년대로 떠나봅시다.


전쟁나면 필요했던 ‘피난 길’의 달라진 위상

양화대교와 한남대교 모두 건설될 당시의 목적은 ‘군사적 용도’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 남짓한 시점에서 한강을 넘는다는 것은 ‘국방상의 이유’가 가장 컸죠. 양화대교는 유사시 탱크나 기갑부대가 빠르게 남하 할 수 있는 다리가 필요했을 뿐이었고, 한남대교는 서울 시민의 빠른 남하를 위해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강 너머에 그리 특별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죠. 특히나 한남대교는 더욱 그랬습니다. 1966년 한남대교가 만들어지던 때에 한강 이남 땅은 3년 전에야 갓 서울에 편입된 그야말로 ‘촌동네’였죠. 하지만 두 다리 모두 착공과 동시에 위상이 크게 달라집니다.

양화대교가 착공된 1962년은 김포공항의 활용도가 점점 커지는 상황, 그리고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공업밸트’가 구체와 되는 상황에서 영등포의 중요성이 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모두 양화대교의 중요성을 증폭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죠.

양화대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역할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경인공업밸트’를 완성하는 다리라는 점이었습니다. 1963년 서울의 대규모 확장 당시 가장 유력한 편입지역으로 서울 서부권이 검토될 정도로 ‘경인공업밸트’ 향후 서울의 발전을 상징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영등포는 이미 식민지 시기부터 공업지역으로 개발되었던 곳이었고, 박정희 정권은 이 공업지구를 동쪽으로는 성수에서 서쪽으로는 인천항까지 이으려 했죠. 양화대교는 그 원대한 공업밸트 개발의 시작이었죠.

한남대교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비슷합니다. 1966년 착공에 들어가고 얼마 뒤, 박정희 정권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것이라고 발표합니다. 엄청난 사건이었죠. 왈가불가 말이 많았지만, 결국은 착공에 들어갔고 한남대교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의 첫 관문의 역할을 하게 되었죠. 한남대교 위상의 더 큰 변화는 ‘강남개발’이었습니다. 영동개발계획이라는 이름으로 한남대교 남단이 엄청난 변화를 맞게 되었던 것이죠.


다리 하나로 달라진 동네의 이미지

다리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달라진 위상 덕분에 다리가 놓인 동네들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양화대교의 경우 남단은 이미 영등포에 공업지구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강 북쪽 동네가 극적인 변화를 맞습니다. 지금의 동교동과 서교동, 그리고 합정동 일대죠. 이 지역은 여름철만 되면 물에 잠겨버리는 상습 침수지구였죠. 서울 시내버스의 종점이 신촌에 있었을 정도로 한강을 건너기 전 서울 서남부의 끝이었음에도 제대로 된 대중교통 노선도 없었던 곳이었습니다.

양화대교는 이런 동네 분위기를 한 방에 바꿔 버렸죠.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했던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양화대교의 완공과 동시에 이 동네를 중심으로 도로를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북가좌동까지만 있던 시내 도로를 양화대교까지 끌어와 연결하고 한강 변에는 강변북로를 뚫어 버리죠. 거기에 동교동에서부터 신촌으로 연결되던 경의선 중간지점까지를 연결하는 도로를 새로 깔아 수색까지 한 번에 연결되도록 해버립니다. 그야말로 서울 서부권 교통의 핵심 동네가 되어버린 것이죠.

ⓒ경향신문

동네의 이미지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상습 침수구역’이라는 이미지에서 서울 서부권의 ‘부촌’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죠. 특히나 서교동과 연희동 주변으로 당시로서도 큰 부지의 고급스러운 주택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이 인근에 남아 분위기 좋은 카페로 활용되는 곳들이죠.

한남대교는 양화대교와 달리 한강 남쪽 동네가 천지개벽하죠. 한남대교 착공 이전 이 동네는 따로 불리는 이름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뜻의 ‘영동’이 이 동네를 통틀어 지칭하는 이름이었죠. 이 동네로 경부고속도로가 놓이고, 서울의 부도심이 형성될 것이라고 발표되자 변화의 물결은 쓰나미처럼 몰려옵니다.

영동의 변화는 땅값의 변화로 설명됩니다. 그것도 아주 압축적으로 설명이 되죠. 가장 극적인 변화는 단연 압구정동입니다. 1963년 평당 3~400원 남짓하던 땅값이 한남대교 건설과 경부고속도로, 영동개발 등이 연속적으로 발표되자 급격히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1967년에는 1,000원을 훌쩍 넘어섰고, 그 뒤로는 해마다 2배에서 3배가 넘는 상승곡선을 그리죠.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15,000원을 넘어섰습니다. 압구정동과 신사동을 넘어 경부고속도로 라인을 따라 ‘복덕방촌’이 형성되었고, 본격적인 ‘말죽거리 신화’가 시작되었죠.

거기에 정권에서 적극적으로 강남개발을 부추기기 시작하면서 공무원 아파트가 건설되고 공공기관이 이전을 준비하면서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명문 고등학교 이전과 고속버스터미널 건설 계획이 서자 개발의 열기는 활화산처럼 타올랐습니다. 정권 차원에서 대규모 주택공급을 위한 강남 아파트 지구가 연이어 신설되면서 ‘강북을 제한하고 강남을 여는’ 개발정책이 시행되었던 것이죠. 한남대교는 이 개발의 시작이면서 끝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청춘이 각자의 꿈을 꾸는 공간

변화된 동네의 이미지는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고착화되었습니다. 지금 서울을 ‘즐기는’ 이들 중에 양화대교 북단과 한남대교 남단의 이전 모습을 상상하는 분들은 많이 없을 겁니다. 너무나도 화려하고 활기 넘치기 때문이죠.

양화대교 북단은 젊음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을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신촌에서부터 시작해서 합정으로 이어지는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은 현재 망원으로까지 이어졌죠. 사실 이 지역에 젊음의 공간이 이렇게나 넓어지게 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의도했던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연세대 앞 신촌을 중심으로 시작된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은 90년대 초까지 활발히 이어졌습니다. 신촌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에 힘입어 주변 상권은 어마어마하게 커질 수 있었죠. 덕분에 신촌은 강북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핫플레이스가 될 수 있었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임대료가 폭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조적인 예술이 탄생하기에는 창작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었죠. 곧 이들은 짐을 싸 주변을 배회합니다. 있어 보이는 말로 하면 ‘젠트리피케이션’의 전형적인 사례죠.

신촌을 떠난 이들이 정착한 곳은 홍대 인근이었죠. 9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의 성지가 된 홍대 인근은 2000년대까지도 젊음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10여 년 전 신촌과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죠. 음악인이 중심이 된 홍대 주변에서 활동하던 문화예술인들은 다시 짐을 쌌습니다. 그리고 다시 인근으로 흩어졌죠. 합정에서 상수로, 서교동에서 망원으로 양화대교와 더 가까이 짐을 쌌습니다. 그렇게 적어도 아직까지‘는’ 양화대교 북단이 젊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한남대교 남단은 조금 다른 젊음의 상징입니다. 압구정동의 유명세는 1990년대 초반 강남의 1.5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오렌지족’들의 활동무대로 시작되죠. 처음부터 이곳은 부유한 젊은이들의 유흥과 환락을 상징했습니다. 하지만 압구정이라고 젠틀리피케이션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렌지족’과 성장한 압구정동은 곧 임대료 폭발적인 상승을 감당해야 했고, 상권은 주변으로 흩어졌죠.

ⓒ이코노미스트

한남대교 남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압구정을 벗어난 상권은 한남대교 남단 주변을 벗어나지는 않았죠. 압구정동에서 가로수길로, 그리고 신사역 인근으로 점점 한남대교 인근으로 상권을 확장했습니다. 그렇게 강남을 상징하는 젊음의 공간이 확장된 것이죠. 이곳은 1970년대 새롭게 태어난 또 하나의 서울이자 강남의 메인스트림이면서 젊음과 유흥, 그리고 부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기능합니다.

양화대교와 한남대교를 드나드는 젊은이들에게는 이 두 다리가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알게 모르게 서로 다른 청년 계급을 상징하는 곳이 되어버렸죠. 여러분들은 어떤 다리를 주로 건너시나요? 그리고 어떤 다리를 건너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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