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두 번째 장, 이 땅의 여러 나라

사슴의 나라 부여

부여는 한국 고대사에서 고조선 다음으로 국가를 형성했던, 우리역사상 두 번째 국가입니다. 부여는 위만조선이 존속했던 시기인 기원전 3~2세기경부터 사료에 보이기 시작해 494년 고구려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약 700년간을 존속한 국가입니다.

부여는 지금의 만주 송화강 유역에 근거해서 살았는데 평탄한 평야에 가축을 놓아기르고 오곡이 풍성하며 사람들의 품성이 좋아 예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자신들이 기르는 가축을 신성하게 생각해 그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라는 관직을 설치하기도 했지요.

‘가’들은 왕을 중심으로 두고 따로 행정구역으로 네 지역을 다스렸는데 이걸 ‘사출도(四出道)’라고 해요. 이들의 권력은 부여의 왕 못지않았습니다. 나라에 가뭄이 들면 왕을 죽이기도 했다는 기록을 보면 강력한 왕이 절대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죠. 또한 중국과의 외교관계도 활발했어요. 중국사서에서 부여를 우호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관계가 좋았다고 볼 수 있어요.

부여는 3세기경, 선비족 기반의 모용씨 집단에게 두 차례 큰 공격을 당했고 거의 멸망직전에 갔었어요. 간신히 나라를 추스르고 명맥을 유지했지만 결국 494년, 고구려에 항복함으로써 긴 역사의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출처 : 백납본, 직접스캔)

사나운? 용맹한? 고구려!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고구려의 초기모습은 주몽신화가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한 나라이죠. 고구려는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부여보다 더 남쪽의 압록강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나라입니다.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해서 열심히 일해도 양식이 부족했었지요.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초기부터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고 통합하면서 국세를 키워나갑니다.

부여와 비슷하게 고구려 역시 왕 아래에 여러 대가들이 있었고 이들은 상가, 고추가, 대로, 패자라는 이름으로 불렸어요. 또 국가의 중대사가 있으면 이 ‘여러 가(諸加)’ 회의를 통해 결정했어요. 연합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거죠. 왕권이 초기에는 미약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고구려는 삼국시대까지 거듭 발전을 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죠.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출처 : 백납본, 직접스캔)

옥저·동예, 질 좋은 특산물은 모두 고구려로

옥저는 현재 함경도, 동예는 지금의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 지역에 위치했던 작은 정치체입니다. 옥저는 위만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이 옮겨가 살기도 했고, 부여가 3세기경 모용선비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 일부가 도망쳐 와서 살기도 했던 곳이에요.

옥저는 앞에서 살펴본 부여, 고구려와 달리 통합된 정치세력이 없었고 각각의 작은 마을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지도자가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어요. 부여와 고구려처럼 ‘가’와 같은 힘센 정치세력 없이 자신들 스스로의 삶을 그들과 달리 영유한 것이지요.

옥저는 동해에 가까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특히 소금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어요. 주변국가에 해산물과 소금을 주로 수출했지요. 토지가 비옥해서 농사도 잘 됐어요. 그래서 그런지 옥저는 풍족한 먹거리와 소금을 노리는 주변국가의 침략을 많이 받았어요. 특히 고구려가 가장 많이 빼앗아 갔죠. 심지어 고구려는 옥저의 사람들도 빼앗아 노비로 삼았어요. 결국 중국기록에 “나라가 작고 큰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고구려에 복속되었다.”라고 기록되면서,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 옆에 있던 동예도 해안가 인근에 살면서 강력한 정치세력 없이 지도자가 마을을 다스리는 형태로 지냈어요. 동예는 말이 유명했는데 이 말은 과하마(果下馬)라고 불렀어요. 오래 달리고 튼튼하다고 정평이 난 말이었어요. 활을 잘 만들었는데 단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이 지역의 특산품으로 반어피(斑魚皮)라고 하는 가죽도 있었지요. 또 문표(文豹)라는 무늬 있는 표범의 가죽도 생산했어요. 이런 특산품들은 주변의 강대한 세력, 특히 고구려가 이를 많이 탐냈어요. 큰 나라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있었고, 규모도 작았지만 내실은 알찼던 옥저, 동예는 더 크게 성장하지 못한 채 이후 서서히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으로 흡수되어갔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옥저’ (출처 : 백납본, 직접스캔)

백제, 신라, 가야의 초기 모습은 어땠을까?

한반도 남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현재 경기 충청 전라지역, 경상북도 대구와 경주지역, 경상남도 낙동강 하류 유역정도가 되겠지요? 이 지역들의 특징은 기후가 따듯하고 강수량이 충분하며 평야가 있고 큰 강도 있어서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지형조건이지요. 여기에서도 각기 정치체들이 발생해서 나름의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경, 북방에는 부여와 고조선이 존속하던 시기 남방에는 일찍부터 진(辰)이라는 토착 세력들이 살고 있었지요.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급격한 사회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유망민들에 의해 진(辰)은 철기문화를 대표로 한 새로운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어요. 이후 기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급격히 발전하게 됩니다. 발전한 사회는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3개의 한, 즉 삼한의 형성으로 이어집니다.

삼한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큰 것은 마한으로, 마한을 이루고 있던 54개 소국 중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를 이끄는 주도 세력이었어요. 삼한의 지배자 중 세력이 큰 것은 ‘신지’, 작은 것은 ‘읍차’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북방의 여러 세력과 달리, 삼한 지역은 제정분리 사회였는데요, 정치적 우두머리는 아까 말한 ‘신지’, ‘읍차’와 같은 사람들이고, 종교적 우두머리는 ‘천군’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어요. 특히 마한의 국읍에는 천군이 있어서 천신 제사를 담당했었어요. 또한 별읍에는 신성지역인 소도가 있어서 귀신제사를 모셨습니다.

철기문화가 발달하면서 삼한도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마한의 소국 가운데 백제국의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마한 지역을 통합해 가기 시작했고, 낙동강 유역의 변한 지역에서는 가락국이, 진한 지역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고대국가로 가는 길을 다져갔습니다.

『후한서』 동이전 ‘한’ (출처 : 급고각본, 직접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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