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혐오 사상으로 물들어 있다. 이는 이성, 종교, 세대간 혐오를 넘어 국가 대 국가간 혐오로도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일본과 중국을 향한 혐오 정서가 상당한 편인데, 중국의 경우 동북공정, 한중 문화갈등과 같은 이유들로 ‘혐중’, ‘반중’ 인식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혐한’, ‘반한’ 인식이 거세지고 있다. 한국과 중국간 혐오 정서가 만연해지고 있는 현 상황 속에서 양국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변화하게 된 배경을 알아보고 더 나아가 혐오가 심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나 개인적 차원에서 어떤 노력을 해야할지 알아보자.
동북공정, 중국의 억지가 만든 뜨거운 감자
여러분 모두 한 번쯤은 ‘동북공정’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동북공정의 시작은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중국변강연구소)’과 ‘동북삼성’이 함께 추진한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의 앞, 뒤 글자를 딴 ‘동북공정’을 한국 미디어에서 보도한 것이었다. ‘공정’은 프로젝트를 의미하는데, 동북공정의 경우 2002년부터 5년간 진행됐으며 현재는 끝난 상태다. 그러나 동북공정 프로젝트 자체는 끝났지만 그 연구 성과나 기본적인 인식이 학술적, 민간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동북공정‘이라는 특별한 어휘를 사용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동북공정이 현재적 문제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논란의 여지가 있는 동북공정을 중국에서는 왜 추진했던 것일까? 우선 중국은 1개의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다민족 국가다. 이 소수민족과 관련된 문제는 곧 ‘변강’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변강’이란 변방, 변경, 국경지대 등을 의미하는 용어다. 복잡한 소수민족과의 관계나 변경, 국경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써 ‘민족’ 개념을 창안해 활용한 것이다. 다양한 것들을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 개념이기도 한데, 이러한 역사관을 확립하고 소수민족 문제를 해결해서 국민적·영토적으로 통합하려는 중국 정부의 의도가 동북공정에 실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동북공정은 학술 문제인 동시에 정치 문제인 것이다. 당면한 중국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리로써 역사 문제를 활용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고구려도 중국사야! 발해도 중국사야! 끊임없는 역사 왜곡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동북공정의 사례는 고구려사와 관련한 역사 왜곡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자 한 것이다. 또한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 지방 정권으로 이해하고 그것들을 중화민족의 역사로 간주하고자 했다. 게다가 ‘현재 중국 영토 내에서 각 민족이 이뤄낸 활동은 모두 중국사’라는 편협한 해석을 가지고 전통적인 역사를 재조정하려는 노력들이 동북공정에 실려 있다.
이러한 동북공정은 중국을 대국으로 여기던 한국이 중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 혐중의 ‘전환점’으로 보기도 한다. 한중 수교 이후 동북공정 이슈가 터지기 전까지는 중국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이 확산됐었다. 그러나 고구려사를 비롯한 역사 왜곡 관련 갈등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중국 중심 세계관? 알고 보면 생각보다 더 옛날 얘기!
최근뿐만 아니라 근대 동아시아의 경험 속에서도 중국을 향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은 예로부터 ‘사대’의 대상이었다. 보편적인 문명의 중심이었기에 대국으로 칭송받곤 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민간의 입장에서 중국은 추상화된 대상이었으므로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진 않았을 것이다. 중국과 대면하는 계층은 주로 왕이나 특권을 가진 상인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개항을 기점으로 중국 상인과 병사들을 직접 접촉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ex. 임오군란) 중국에 대한 추상적, 관념적 이미지가 차츰 변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중국을 향한 근대의 인식과 관련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건은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을 두고 보통은 ‘화이변태(명과 청의 교체로 인한 중국의 이변)’로 부르곤 한다. 그 정도로 기존의 중국 중심 문명관이 완전히 변화한 것이다. 거기에 일본 제국이 나타나면서 한말 시대의 중국 인식이 분화되기 시작한다. 이전과는 달리 대국으로서의 중국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청일전쟁의 패배로 중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독립신문>의 기사만 보아도 ‘중국이 천하고 낙후돼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변화된 중국관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더욱 고착화된다. 이 시기에는 일제가 중국을 멸시하는 ‘지나 사관’이 유행했다. 지나 사관이 주입된 결과, 식민지 노동 시장에서 중국 상인과의 경쟁 과정이 중국관과 관련한 부정적인 정서를 초래했을 것으로 본다.
이후 한국이 해방을 맞고 남북이 분단되면서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중국관에 영향을 미쳤다. 남한의 입장에서는 중국이 ‘적성국(적국)’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해졌고 냉전형 부정적 인식이 팽배했다. 탈냉전 시기로 넘어오고 1992년 한중 수교가 시작된 순간부터 새로운 중국관과 대면했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는 동아시아 내 미국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중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화된 세력 전이가 일어나면서 한중 관계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세계적으로 만연해 있는 상태다.
나의 혐오는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나라는 혐중은 물론 특정 대상을 향한 혐오가 유달리 심해진 국가다. ‘혐오’라는 키워드로 시대의 성격을 진단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고 본다. 이러한 혐오는 대상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혐오에는 ‘차별’이 부착되기 때문에 또 다른 편견이나 혐오를 낳게 되므로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 속에 ‘혐오’라는 사회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한중 관계 역시 이러한 혐오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다. 혐오 사상이 심화하는 이유를 두고 역사학적으로 해석하면 ‘글로벌한 세계의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그 속에서는 오히려 민족주의가 강화된 것이다. 또한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판단해 본다면, 늘 경쟁에 노출된 일상에서 타자에 대한 이해나 수용의 폭이 좁아짐으로써 발생한 ‘공동체적인 훈련의 결여’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다.
혐오에 대한 원인을 진단하고 나면 ‘이에 대한 극복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남게 된다. 이러한 구조적인 제약을 개인의 힘으로 감당해 내기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혐오에 가까운 인식을 객관적이고 타당한 진실에서 나온 것인지, 혹은 편견이나 고정관념에서 이어진 것인지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