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서울은 언제나 “만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밀려드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주택보급률은 1980년대까지도 언제나 50% 언저리에 머물렀다. 처참하지 않은가. 서울 사람 절반이 집이 없었다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50%는 항상 집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누군가는 집이 없어 판자촌으로 밀려나거나 그마저도 철거되어 쫓겨나야 했지만, 그곳에는 언제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이것이 단순한 자본의 논리였을까?
도시의 ‘잔혹한’ 역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서울이라는 공간 안에서 밀려난 사람들과 밀려난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 사이의 희비에서부터 말이다. 이 잔인한 ‘희와 비’를 단순히 이를 ‘피해’와 ‘가해’의 역사로 낙인찍을 수는 없다. 어느 순간부터 정부는 끊임없이 주택을 소유할 것을 ‘강요’해왔고, 기회가 주어진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이러한 도시 발전의 매커니즘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은행에서 빚을 지고 집을 사는 사람들, 빚내어 선지불한 돈으로 집을 짓는 기업들, 중간에 빚을 내어주는 은행, 이를 종용하는 정부. 완벽한 자본주의적 주거문화의 사이클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들 사이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지금의 ‘집값’이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제까지도 누군가는 그 ‘집값’을 감당해왔고, 오늘도 누군가가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 이 잔인한 사이클이 만들어진 걸까?
서울이 최초로 계획되던 그 순간, ‘인간’은 둘로 나뉘었다
해방과 전쟁을 거친지 고작 10년도 안 되었을 그 무렵, 정확히는 1961년 바로 그때. ‘무허가’로 가득했던 도시 서울 땅에 군인이 발을 들여놨다. 그러고는 큰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서울의 면적이 엄청난 양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물론 이전부터 서울의 시역은 확장되고 있었지만, 1963년의 대규모 확장은 이전의 확장과는 확실히 달랐다.
당시 250만 명 수준의 인구와 향후 인구증가 폭(500만 명)을 예상하더라도 너무나 광활한 면적을 확장하게 된다. 그것도 농지와 임야로 가득한 한강의 이남 땅, 그러니까 지금의 강남땅을 흡수한 거다.
땅이 넓어졌으니 서울은 살만한 곳이 되었을까? 집을 지을 땅은 넓어져도 집을 지을 돈이 없으면 그 땅은 결국 무용지물이다. 서울시 인구증가폭은 급상승하는 상황(1960년 244만 명에서 1966년 380만 명으로 급증_140만 명의 급증)이었으며, 넓어진 땅덩어리에 맞는 도시계획이 절실히 필요해지게 된다.
바로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한 김현옥이다. 부산시 도시계획(실상은 무허가판자촌 강제 철거 후 개발)에 감명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부산시장이었던 그를 서울시장으로 전격 스카웃한다.
이때 김현옥 서울시장과 박정희 정권의 눈에 들어온 매력인 단어가 있었다. 바로 중산층이다. 서울에 집중된 고학력 사무직 노동자와 잠재적 ‘중산층’들은 1966년 전국 평균임금(34,500원)의 두 배 가까운 평균임금(62,000원)을 받고 있었다. 서울에 이러한 인구가 높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높은 대졸자 비율 18.5%(전국 4.8%)과 이들의 취업 자리가 몰려있었던 거다.(서울시 전체 인구 중 관리·사무직 종사자 약 40%, 전국 평균은 약15%)
문제는 ‘중산층’이 살아갈 공간이었다. 서울의 주거환경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집 자체가 부족한 것은 둘째 치고 있는 집이라고 해봐야 제대로 주택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밀려드는 도시민, 늘어나는 중산층, 열악한 주거환경. 이러한 조건 속에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서울은 앞으로 중산층의 도시로 거듭나야 했다.
그렇게 서울시는 인간을 둘로 나눈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1966년 7월, 취임 후 처음으로 출석한 국회 본회의장에서 서울시 주택정책의 큰 그림을 발표한다. “앞으로 서울시민은 중산층과 서민으로 구분한다!”는 말과 함께. 서울시정에 ‘중산층’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첫 사례이자, 시민을 양분하여 관리하겠다는 ‘담대’한 도전이었다.
일단 짓고 보자, “돈이 없으면 빌려줄게”
그렇게 김현옥은 서울 RE빌딩의 원대한 꿈을 꾸게 된다. “싸우면서 건설하자”, “도시는 선이다”라는 말과 함께. 김현옥은 딱 저 표어대로 서울을 변화시키려 했다. 부도심지역(여의도, 동부이촌동, 강남)은 중산층을 위한 지역으로 확고히 하면서 도시의 한 축으로 기능하게 하려 했고, 도심지역의 무허가판자촌은 과감히 철거시킨 후 상가아파트와 시민아파트 건립했다.
그렇게 부도심과 도심을 연결하는 도로(아현고가/서울역고가/청계고가/한남대교)와 터널(남산1, 2호, 삼청, 사직)이 건설되었고, 강변북로도 이때 건설된다. 이 모든 것이 4년 동안 있었던 일이다.
그나마 명목상으로라도 존재하던 서민형 주택건설 계획은 시민아파트 형식으로 건립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전면 백지화된다. 이후 서울시의 아파트 정책에서는 노골적으로 “서민”이 사라지고, “중산층”(시범아파트, 시영아파트 등)만이 남게 된다. 솔직해진 거다. 이제 남은 건 새롭게 계획되고 기획되는 부도심(여의도와 강남 등)의 주거지였다.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뻔한 곳에서 터졌다. ‘돈이 없다’는 시민들의 ‘아우성’이었다. 이미 부도심지역은 지가가 오를 대로 올라 토목회사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건설업체들이 다량의 주택을 지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계획보다 서울의 집값이 빠르게 올랐고, 이를 ‘중산층’조차 감당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거다.
박정희 정권은 이때다 싶어 기다렸다는 듯 문제를 해결한다. 바로 주택은행의 설립이다. 1967년 설립된 주택금고는 김현옥 시장의 공격적 도시건설이 한창이던 1969년 주택은행(50% 공적자금, 50% 민간자금)으로 확대 개편된다.
그렇게 주택은행이 만들어지자 박정희 정권은 품고 있던 꿈을 마음껏 펼치게 된다. “돈이 없어? 돈은 은행에 있어!”를 소리 높여 외쳤다. 본격적으로 금융권 대출을 통한 주택‘소유’를 권장하고 ‘My홈’(1가구 1주택)담론을 형성해 나간다.
주택은행을 통해 집을 사는 방식은 중산층에 최적화된 ‘금융제도’였다. 대출과 예금, 적금의 핵심에는 ‘정기성’이 있었고, 꼬박꼬박 매달 은행에 돈을 갚을 수 있는 계층은 중산층 이상이었다. 실제 주택은행을 이용해서 집을 구매한 사람들의 평수는 대부분 고평이었고, 15평 이하의 집을 위해 대출은 받는 사람들은 3.1%에 불과했다.
사실 주택은행의 설립으로 혜택을 받은 건 기업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주택은행 설립 이후 건설경기 활성화를 목표로 기업에게 건설업 투자를 권유하게 되었던 거다. 1969년 이후 주택은행 대출을 통한 기업의 건설투자가 급상승한 것은 이 때문이다.
중산층의 가나안 땅, “이곳이 약속의 땅이다”
김현옥의 전투적인 추진력과 주택은행의 대출이 환상적으로 콜라보레이션되면서 만들어지는 공간이 바로 여의도와 강남이다. 여의도는 서울시 예산으로 시범아파트를 先건설하고 토지가 구획되고 정리되면서 민간기업의 투자가 확정되게 된다. 너무나 환상적인 궁합이었다.
이러한 개발 방식은 여의도를 기준으로 강 오른편 변으로 확대된다. 동부이촌동, 압구정, 반포 등 여의도와 같은 매립지를 중심으로 개발이 진행되었던 거다. 투자의 물결은 한강 물길을 따라 불같이 타올랐고, 분양권을 받기 위한 인파는 새벽잠을 포기하고 줄을 섰다.
영동, 그러니까 지금의 강남은 이러한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개발이 순항을 달리게 된다. 영동 제1지구 개발 사업은 제3한강교(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 확정되면서 노른자 땅이 되었고, ‘말죽거리 신화’가 시작되었다.
영동 제2지구 개발은 1지구의 성공에 힘입어 더 공격적으로 시행된다. 연이은 성공은 강남을 본격적으로 인구 분배를 목적의 신시가지로 만들려는 목표로 굳어진다. 현재의 강남구 청담동, 논현동, 역삼동, 삼성동, 대치동 등이 바로 이때 맞물려 개발되기 시작한다.
정권은 노골적으로 강남개발을 촉진시키려 했다. 강북의 유흥시설과 백화점, 시장 등의 신·증설이 금지되면서 강남개발을 위한 강북억제책이 본격화되었다. 1975년에는 한강 이북지역 택지개발금지조치가 취해지기까지 했으니 강남은 그야말로 황금 땅으로의 변화를 예고했다. 땅값은 치솟았고, 중산층은 짐을 싸들고 강을 건너 한강 이남으로 향했다.
중산층이 강남에서 찾은 집은 네모 반듯하게 한강을 바라보고 선 아파트였다. 포텐이 터지기 시작한 것은 반포아파트였다. 반포아파트의 성공은 금융권 이용을 통한 주택구입이 확대될 것임을 보여준 사업이었다. 은행과 강남은 이렇게 처음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반포아파트의 성공 이후 강남권에 대한 건설기업들의 과감한 투자가 줄지어 이어졌다.
강남에서의 성공은 잠실개발로 이어진다. ‘강남3구’의 시작이다. 서초구, 강남구, 그리고 송파구. 이렇게 세 개의 지역구가 묶여서 이야기되는 건 집값이 높아서만이 아니다. 개발의 매커니즘이 같기 때문이다. 광활한 땅덩어리를 대상으로 한 정권의 과감한 구획 정리, 건설기업의 일괄적인 막대한 투자, 주변 지역의 개발 억제, 중산층이 감당할 수 있을만큼의 공급가격이 완벽히 맞아 떨어진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게 중산층이 살기 좋은 도시, 중산층을 위한 도시 서울이 완성된 거다.
그래서 결국 서울은 누구를 위한 도시일까?
새 돌이 굴러오면서 박힌 돌은 서울 안 어딘가를 찾아 서성이다 결국은 서울 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1960년 후반부터 시작된 한강변과 강남의 성장은 도시빈민의 강요된 ‘희생’ 위에서만 가능했다는 것을 끊임없이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개발의 시작부터 이른바 ‘서민’은 서울시 주택정책의 변두리에 존재해야 했다.
급속도로 증가하는 도시인구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국가재정(예산편성에서 주택보급에 책정된 금액은 언제나 1% 내외)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건설을 담당하는 민간기업이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건 어쩌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민간기업은 건설업을 통해 이윤을 창출해야 하고, 그 이윤을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필요하다. 고도성장기 한국은 기업에게 주택보급의 핵심key를 양도했고, 보급된 주택에 들어갈 이들을 ‘주조’할 필요가 있었던 거다. 이때 주목받은 도시가 서울이고, 핵심 계층이 중산층이었다.
1970년대 중산층으로 성장해 강남에 눌러 앉았던 ‘옛 중산층’ 어느덧 부유층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 제1의 도시 서울은 부유층이 살기 좋은 도시가 되어버린 거다. 우리는 이제라도 서울 개발의 방향성을 뒤엎을 수 있을까?
글쎄, 모를 일이다. 사실 근본적인 메커니즘이 변하지 않는 한, 어쩌면 서울은 그렇게, 여전히, 앞으로도 그들을 위한 도시가 될 것 같다. 안타깝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