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왕이 된 그 남자, 영조
숙종은 ‘환국’이라는 극단적 형태의 정국 운영방식을 선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붕당 정치의 변질을 가져온 임금이었습니다. 숙종 집권 이후 각자의 붕당이 생각한 공론, 그러니까 조선을 어떤 나라로 만들 것인가를 두고 서로의 의견에 치열하게 토론하던 모습은 사라졌죠. 그저 상대 붕당을 없애야 할 대상, 심지어는 상대 붕당의 인물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는 비정상적 정치가 일상화되어 버린 겁니다.
문제는 숙종 이후였습니다. 숙종이 그토록 자신감 있게 ‘환국’을 주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지하다시피 그의 ‘완벽한’ 정통성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정실 소생인 왕자가 없었죠.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장희빈의 아들이 세자 자리에 앉아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으며 경쟁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인현왕후가 이미 죽은 뒤였고, 세 번째 왕비였던 인원왕후에게서도 왕자를 얻지 못했죠. 숙종에게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경종은 장희빈의 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노론의 거친 압박 속에도 달리 대안이 없었다는 이유 하나로 불안정한 세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숙종은 건강 악화를 핑계로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게 되는데, 이때부터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세력이 양분된 채 정국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후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과 연잉군은 정치적 위기 속에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소론의 위세였습니다. 경종은 정국 운영에 있어 소수파였던 소론과 힘을 모아 다수파였던 노론과 맞서야 했죠. 노론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영조를 ‘왕세제’, 그러니까 다음 왕이 될 수 있도록 조치하려 시도하다가 소론의 반발로 ‘신축옥사’가 일어나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후 소론은 기세를 몰아 반역사건을 조작해 ‘임인옥사’를 일으키고 노론을 ‘박멸’하기 위해 안감힘을 쓰게 됩니다. 국정은 대혼란으로 빠져들게 된 겁니다.
연잉군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지만, 경종은 유일한 혈족인 연잉군을 매몰차게 버릴 수 없었습니다. 소론은 끝없이 연잉군을 공격했고, 연잉군 스스로도 ‘세제’ 자리를 그만하겠다며 경종에게 청했지만, 경종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경종은 31세의 나이로 숙환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죠. 연잉군이 왕세제로서 국왕이 된 겁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조선의 21대 왕 영조입니다.
이렇듯 어렵게, 어떤 면에서는 얼떨결에 왕이 된 영조는 즉위 직후부터 왕위를 보위하기 위한 외로움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외로운 싸움 끝에 영조에게 ‘늦둥이 아들’이 찾아옵니다. 장차 왕이 되어야 했던 그의 아들에게 영조는 자신이 겪은 ‘힘들고 외로운 삶’을 직설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고 합니다. 세상 가장 엄한 아빠가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아들은 영조와 달랐습니다. 서로 달랐던 둘의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죠. 바로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부자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던 걸까요? 대체 얼마나 큰 문제에 휩싸였기에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던 걸까요? 이 문제는 정말 ‘가족의 일’에 불과했을까요? 둘의 관계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도세자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잔인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영조의 '트라우마'에서부터 풀어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넌 꼭 전교 1등을 해야 한다
즉위 과정만 놓고 보더라도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연잉군이 왕위에 앉은 것은 노론의 강력한 지지 덕분이었습니다. 때문에 영조는 즉위 초, 본인의 정치적 파트너인 노론의 눈치를 봐야만 했죠. 빠르게 ‘신축옥사’와 ‘임인옥사’ 때 피해를 입은 노론을 복권시키고 소론 세력 중 양 ‘옥사’의 주동자를 처형한 건 그런 연유에서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강력한 왕권의 영조가 아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에게도 정치 풋내기 시절이 있었죠.
하지만 하나 걸리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경종의 죽음이 ‘숙환’이었다고는 하지만, 워낙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에 의혹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영조가 형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까지 도는 상황이었죠. 이런 가운데 1728년 소론 세력이었던 이인좌를 중심으로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들과 공모해 밀풍군(소현세자의 증손자)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른바 ‘이인좌의 난’입니다. 난은 곧 진압되었지만, 진압된 이후에도 이인좌는 국문을 당하는 와중에서도 영조를 똑바로 바라보며 “당신을 결코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이 일은 영조에게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기게 되죠.
아버지와 같은 정통성도 갖추지 못했고, 즉위 과정에서 형에 대한 ‘독살 의혹’마저 불거진 채 앉은 조선의 국왕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던 임금이 바로 영조입니다. 왕이라는 자리를 어렵게 얻기도 했지만, 어렵게 지키고 있는 자리였죠. 그때 영조는 아버지를 떠올렸을 겁니다. “그래, 결국은 왕이 강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은 할 수 없었죠. 그럴만한 힘도 지지세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탕평책’이었습니다. 국왕이 중심에 있되,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설득해 화목을 권하는 방법이었죠. 때로는 유하게 타일렀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과감하게 내쳤습니다. 관직의 배치도 마찬가지죠. 노론, 소론이 적절히 안배된 배치였습니다. 영조는 경종보다 건강했고, 아버지를 닮아 강단이 있었습니다. 초기의 혼란함은 곧 안정으로 돌아섰습니다. 오랜만에 정계에는 노론과 소론, 게다가 숙종 때 잘려나간 남인까지 고르게 등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죠.
하지만 어찌 세상 모든 일이 똑 부러지게 공평하게만 돌아갈 수 있나요. 영조의 왕권은 노론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영조도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조의 탕평은 아무래도 노론에 치우쳐진 측면이 강했죠. 게다가 ‘이인좌의 난’ 당시의 트라우마는 지울 수 없는 상처였고, ‘공명정대’의 탕평은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었습니다.
이런 정치적 안정과 혼란의 교묘한 이중주 속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선, 즉 사도세자입니다. 영조는 정실 왕비에게서 오랜 시간 후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었던 효장세자는 9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죠. 이후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이었던 사도세자가 7년 뒤 태어난 겁니다. 그때 영조 나이가 마흔 하나였으니, 당시 기준으로는 노년에 아들을 다시 안을 수 있었던 겁니다. 당연히 영조의 기쁨은 엄청났습니다. 어렵게 잠재운 붕당 간의 갈등 속에서 얻은 큰 기쁨이자, 마음의 안식이었으니까요.
“이제야 조상님 볼 면목이 섰다”는 영조의 말에서 사도세자의 탄생은 단지 자식이 생겼다는 기쁨을 넘어, 왕위를 이를 아들을 얻었다는 안심이기도 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당당히 자신의 뜻을 이어받아 정국을 이끌어 갈 재목으로 성장만 해주면 될 일이었죠. 그래서였는지, 영조는 후속 작업을 서둘렀습니다. 곧바로 아들을 중전의 양자로 들여 원자로 삼았고,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해버립니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라고 보여집니다. 조급함이 묻어난 처사였죠.
영조의 바람을 알아먹기라도 하는 듯 어린 시절 사도세자는 총명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했습니다. 만 2세 때부터 글자를 읽었고,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아버지를 가리키는가 하면 ‘세자’라는 글자를 보고는 자기를 가리키기도 했죠.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3살 나이에 글자를 읽을 줄 알았다니, 세상에 자식이 얼마나 이쁘게 보였을까요? 게다가 이런 총명한 아들이 내 뜻을 이어만 준다면? 영조의 기대감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만 갔습니다. 이때부터 영조는 ‘전교 1등’만을 바라는 아버지가 되어 갑니다. 1등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말이죠.
영조는 사도세자의 결혼도 서둘러 마무리 지어 버립니다. 8세 때 세마(정9품)였던 홍봉한의 동갑내기 딸과 혼인을 했는데, 혼인 상대가 그 유명한 혜경궁 홍씨입니다. 둘은 혼인 후 7년 뒤 첫아들을 낳았지만,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2년 만에 아들을 잃습니다. 이후 같은 해 다시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입니다.
한편 어느 날부터인가 사도세자는 군사놀이를 즐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병서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장수와 신하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여 <무기신식(武技新式)>이라는 책을 엮었을 정도로 관심을 넘어 능력도 있었습니다. 원래 인간이 다 그렇지 않나요. 자기가 잘하는 분야를 알아채고 나면, 거기에 더 집중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사도세자의 무예에 대한 관심은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군주로서의 덕목’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아버지와의 갈등도 시작되죠.
📃부자갈등에 정치적 이슈가 첨가된다면?
영조는 자신이 스스로 실천했던 엄격한 규율을 아들에게도 요구합니다. 영조에게 왕이라는 자리는 끝없이 자신과 학문을 갈고닦아 신하들의 위에서 군림해야 하는 자리였죠. 여차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자리가 왕이었으니까요.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세자는 9살 무렵부터 아버지를 만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사실상 ‘아동학대’에 가까웠던 겁니다.
지속적인 아동학대는 사도세자가 아는 것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원래 이런 문제일수록 악순환의 반복이죠. 영조는 되려 그런 아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는 아들을 다시 혼내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사도세자가 정상적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심지어 영조는 신하들이 보는 자리에서 아들을 불러놓고 화를 내고 “이게 다 너 때문이다”라고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자연재해까지 “세자가 덕이 없어 그렇다”고 말하는 식이었죠.
하지만 진정한 갈등은 이제부터입니다. 바로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으로 정무에 직접 관여하는 시점이죠. 세자가 14세 때인 영조 25년(1749년)에 시작된 대리청정은 영조와 사도세자 관계에서 중요한 변곡점이었습니다. 대리청정은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한 훈련의 목적도 있었기에 영조와 사도세자 모두에게 기회일 수 있었습니다. 영조도 이를 노리고 마련한 자리였고요.
하지만 사도세자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대리청정 시작되기 전 이미 이상한 낌새가 있었기 때문이죠. 대리청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영조는 다섯 차례에 걸쳐(재위 15년, 16년, 20년, 21년 , 25년)의 양위 의사, 그러니까 “나 왕 안 할래”를 외친 겁니다. 이른바 ‘양위 파동’입니다. 그때 사도세자의 나이는 각 4, 5, 9, 10, 14세였습니다.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두려움에 떨며 아버지에게 철회를 애원해야 했죠. 심지어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있었으니, 세자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조는 ‘양위 파동’을 통해 신하들과의 관계에서 ‘텐션’을 주려 했습니다. 일종의 충성을 검증하고자 하는 영조만의 방식이었던 겁니다. 마치 숙종의 ‘환국’과도 같은 역할이었죠. 영조는 양위 선언을 통해 ‘누가 더 나에게 애원하는지’를 확인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겁니다. 실제 영조에게 ‘양위 의사’가 없음을 왕도 알고, 신하도 알고, 아들인 사도세자도 알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과정을 사도세자는 4살 때부터 주기적으로 겪어야 했죠. 게다가 대리청정 후로는 아버지가 아들을 더욱 질책하는 자리가 많아졌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문제의 결정타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치적 성향이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정치적 성향을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어 보지만, 영조가 강조했던 ‘노론을 껴안은 탕평책’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사도세자는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눈에서는 마치 소론과 가까워진 것처럼 보여지기도 했죠. 아버지 입장에서는 이런 모습이 대단히 우려되는 모습이었을 겁니다. 노론의 눈치가 보였던 것도 있었겠지만, 내 눈앞에서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그 ‘소론놈들’과 친하게 지내는 아들이 미웠던 것도 있었을 테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눈치 없는 아들은 아버지와 노론 사이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렇게 부자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게 됩니다. 거기에 노론 세력까지 사도세자에게 불만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이 와중에 영조는 정순왕후 김씨를 새 왕비로 들이면서 후계 구도가 바뀔 수도 있음을 시사했고, 사도세자 본인이 낳은 세손이 영조의 총애를 받게 되자 그 불안함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렇게 아들은 죽고, 손자가 왕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집니다. 형조 판서였던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리를 영조에게 고변했다가 무고 혐의로 참형에 처해지는 사건이 벌어진 거죠. 문제는 이 고변으로 영조가 사도세자의 여러 이상 행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사도세자는 이미 정신병적 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내관과 나인들을 죽이거나, 우물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한번은 평양으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영조는 분노와 동시에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거죠.
하지만 정치는 냉정했습니다. 선을 넘은 사도세자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영조는 결국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출하고, ‘뒤주’에 가둡니다. 그간 영조는 일상적인 국무를 처리했다고 합니다. 마치 아들이 없다는 듯 말이죠. 그렇게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고 9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영조는 빠르게 뒤처리를 감행하죠. 즉각적으로 세손을 동궁으로 책봉했고, 2년 뒤 세손을 사망한 첫째 아들이었던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합니다. 그리고는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는 말을 남깁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죽어서까지 화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지켜 본 손자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그의 나이 11살이 때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고집으로 죽었고, 그 뒤로도 할아버지는 아비를 그리지 말라며 매번 엄한 소리를 해댔습니다. 손자의 마음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치유가 되었을까요? 그건 모를 일입니다. 손자였던 정조는 그렇게 왕이 됩니다.
정치갈등으로 촉발된 세자의 죽음 뒤, 그의 친아들이었던 정조가 아버지와 대립하던 붕당 세력과 상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조가 종국에 택한 방법은 할아버지의 탕평책을 계승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던 할아버지였지만, 본인의 왕으로 만든 것도 할아버지였죠. 본인의 위치 속에서 정조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는 국정 운영의 방법이란 영조의 뜻을 이어받는 것 이외에는 몇 없었습니다. 즉위와 동시에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했지만, 한편으로는 할아버지의 유훈을 따르는 정치를 이어나간 것입니다.
그렇게 12년이 흘러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정조는 할아버지와는 다른 본인의 정치를 시작합니다. 아버지였던 사도세자의 정통성을 확보해 나가면서 국왕 중심의 탕평책을 운영해 나갑니다. 그가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인 일은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던 노론 세력을 분화시키려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죽음’을 새로운 정치 논쟁으로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붕당을 다시 찢어 놓았던 거죠. 그 논쟁을 쥐고 흔들었던 건 국왕 본인이었고, 이를 통해 왕의 권력을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왕이 강력한 왕권으로 쥐고 흔들던 조선의 정계 구도는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시 한번 소용돌이치게 됩니다. 정조가 구상한 ‘시스템’이 완성도 되기도 전에, 시스템을 만들던 강력한 왕권이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그렇게 조선은 세도정치를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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