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줄 요약
- 영조는 왕이 되는 과정부터 통치 초기까지 흔들렸던 왕권을 본인의 실력과 카리스마로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력했던 시기에 태어난 사도세자에게 그런 영조는 세상 가장 엄한 아빠였고,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강고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 서로 간의 오해가 깊어졌고, 거기에 정치적인 문제까지 연결되자 아버지는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지경에 이릅니다.
📃 한 장 읽기
-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영조는 정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하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둡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었던 효장세자는 9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죠. 이후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이었던 사도세자가 7년 뒤 태어납니다. 아들이 귀했던 영조였기에 후속 작업을 서둘렀습니다. 곧 아들을 중전의 양자로 들여 원자로 삼았고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해버렸습니다.
- 어린 시절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이라도 하듯 총명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했습니다. 만 2세 때부터 글자를 읽을 줄 알았다고 전해집니다.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아버지를 가리켰다가 ‘세자’라는 글자를 보고는 자기를 가리키기도 했죠.
- 사도세자는 결혼도 빨랐습니다. 8세 때 세마(정9품)였던 홍봉한의 동갑내기 딸과 혼인을 했는데요. 혼인 상대는 그 유명한 혜경궁 홍씨였습니다. 사도세자는 홍씨와 결혼을 하고 7년 뒤 첫아들인 아들을 낳았지만, 아버지가 첫아들을 잃었던 것처럼 2년 만에 아들을 잃었습니다. 이후 같은 해 다시 둘째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바로 정조가 되죠.
-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군사놀이를 즐겨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병서도 즐겨 읽었는데요. 그만큼 무예도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무예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이때부터 학문과는 조금씩 멀어지게 되는데요. 때문에 아버지와의 갈등도 시작되죠.
- 자수성가의 아이콘 영조는 자신이 스스로 실천했던 엄격한 규율을 아들에게도 요구하게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죠. 이미 아들이 9살 무렵부터 아버지를 만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야 했으니, 갈등은 꽤 오래 누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아동학대로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 지속적인 아동학대는 사도세자가 아는 것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런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버지는 아들을 도리어 다시 혼내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사도세자가 정상적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기란 불가능한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 영조는 신하들이 보는 자리에서까지 어린 나이었던 아들을 불러놓고 화를 내거나 “이게 다 너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는데요. 심지어 자연재해에 대해서도 “세자가 덕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식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사도세자가 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조가 병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죠.
- 둘은 성격이 너무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꼼꼼하면서도 급한 성격이지만 아들은 과묵하고 행동이 느렸다고 기록되어 있죠. 그야말로 상극인 성격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묻는 말에 아들이 머뭇거리며 대답하면 성격 급한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답답하다고만 생각되었던 것이죠.
- 하지만 진정한 갈등은 바로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으로 정무에 직접 관여하는 시점에 시작됩니다. 세자가 14세 때인 영조 25년(1749)에 시작된 대리청정은 영조와 사도세자 관계의 중요한 변곡점이었습니다.
- 사실 대리청정 시작되기 전 이미 이상한 전조 현상이 있었습니다. 대리청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영조는 다섯 차례에 걸쳐(재위 15년 1월, 16년 5월, 20년 1월, 21년 9월, 25년 1월)의 양위 의사를 밝혔었습니다. 이른바 ‘양위 파동’입니다.
- 사실 영조는 ‘양위 파동’을 통해 신하들의 충성을 검증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찾으려 했던 것이죠. 실제로는 양위 의사 없음을 왕도 알고, 신하도 알고, 아들인 사도세자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아들과 신하는 양위를 만류해야만 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제자리도 돌아오는 거죠. 이 과정을 사도세자는 4살 때부터 주기적으로 겪어야 했던 겁니다.
- 사도세자는 결국 20세 무렵 부왕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정신적 질환에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리청정 후로는 아버지가 아들을 더욱 질책하는 자리가 많아졌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 문제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치적 성향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정치적 성향을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만, 영조가 강조했던 ‘노론을 껴안은 탕평책’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세자는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소론과 가까워진 것처럼 보여지기도 했죠.
- 하지만 한미한 출신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이런 모습이 대단히 우려 섞인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요. 본인의 태생을 뛰어넘을 만큼 즉위 과정에서 노론의 힘은 엄청나게 작용했고, 그 힘을 항상 지켜봐 왔기 때문일 겁니다. 정치적으로도 영조는 재위 초기부터 노론에게 엄청난 빚이 있었던 겁니다.
- 아들은 아버지와 노론 사이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특히나 대리청정 시기에 아들이 소론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자 안 그래도 멀어진 부자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리게 되었던 겁니다. 거기에 노론세력 또한 세자에게 큰 불만을 갖게 되죠.
- 그렇게 이른바 ‘임오화변’으로 불리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의 나이 28살에 일어납니다. 세자의 비리를 영조에게 알렸던 나경언이라는 관료가 무고 혐의로 참형에 처해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그 사건으로 인해 사도세자의 정신병적 행동들을 자세히 알게 되었죠. 그리고는 아버지는 아들을 세자 자리에서 폐한 뒤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어 버립니다. 아들이 뒤주에 가두고 아버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왕으로서의 업무를 봅니다.
- 9일 뒤 결국 아들은 9일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장례 절차를 빠르게 진행합니다. 그리고는 곧장 세손을 동궁으로 책봉합니다. 그리고 세손에게는 “아비를 추숭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죠.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죽어서까지 화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지켜 손자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죠. 그의 나이 11살이 때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고집으로 죽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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