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구트’에 투영된 꿈을 향한 판타지

지금 한국은 ‘환상’에 빠져 있다. 그리 나쁜 의미는 아니다. ‘판타지 소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2021년 작년 한 해 종합 베스트셀러 10위에는 총 4개의 소설책이 있었고, 그 중 무려 3개의 책이 ‘판타지 장르’였다. 특히나 그 책들 사이에서 작년부터 올해까지 압도적인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 하나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다.

사실 한국의 출판시장에서 ‘판타지 장르’가 이렇게까지 붐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의 분위기는 조금 생경하다. 물론 이전에도 영화나 웹툰, 웹소설과 같은 분야에서는 이미 ‘판타지’는 하나의 강력한 시장성을 지닌 ‘장르’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종이책 시장에서만큼은 ‘마이너’한 장르임에 틀림없었다. 이런 면에서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팔아치운 종이책 100만 부는 어마어마한 성과다.

더 중요한 사실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성공이 어느 특정한 소설 한 편의 독특한 성공 스토리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재 출판 시장에서 시작된 콘텐츠 시장의 전체적인 흐름이 바로 ‘꿈’과 ‘환상’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현실이 팍팍한 탓인지, 아니면 그저 희망을 찾기 위함인지 몰라도 2022년 한국은 ‘지옥’같은 경제 위기 속 자신만의 판타지를 꿈꾸고 있다.

왜 갑자기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었을까? 누군가는 팬데믹이라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시대 속에서 이전까지 성공의 방정식처럼 노래해 왔던 ‘노오력’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식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꿈’을 꾸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자조적이고 회의적인 현실판단 속, 콘텐츠에서 ‘환상’을 그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한편으로 한국은 희망적인 ‘환상’과 ‘꿈’만을 쫓지도 않았다. 극단적인 사례는 드라마와 영화에서 나타난다. 잔혹하고 공포스러운 종말론적인 이야기를 다룬 ‘어두운’ 판타지 <지옥>이 인기를 끌었는가 하면, 거대한 판돈을 놓고 서로를 죽여야만 승자가 되는 <오징어게임>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두 콘텐츠 모두 《달러구트 꿈 백화점》과는 전혀 다르지만, 현실에서의 좌절을 더 강력한 충격으로 찍어 누르는 일종의 어두운 ‘판타지’라는 면에서는 모두 ‘환상’을 다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굳이 판타지라는 ‘장르성’에 주목해서 “대체 뭐가 판타지라는 거야?”라는 ‘지리한 논쟁’을 거치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말하는 “판타지”라 함은 SF에서부터 모험담, 그리고 흔한 마법 이야기와 요정의 이야기까지를 총망라한다. 그보다 우리가 잠깐 살펴볼 이야기는 한국인들이 다양한 콘텐츠로부터 찾고자 하는 ‘환상’과 ‘꿈’, 그리고 그 ‘꿈’을 쫓아온 역사다. 어려운 이야기하자는 건 아니다. 그저 오랜 시간 이어진 한국인들의 ‘환상 쫓기’에 대한 이야기다.

🎈그 시절에도 좌절은 ‘꿈’으로 이겨냈다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폭군으로 기억되는 연산군 시절. 당대를 풍미했던 ‘도둑놈’ 한 명이 있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홍길동이다. 홍길동이 잡혔을 때 “기쁨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좋아서 왕에게 보고했다고 하니, 그 유명세가 실로 대단한 ‘도둑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기도 참으로 시의적절하지 않겠나. 폭군의 대명사 연산군 시절에 활동한 도적이라니.

하지만 실존했던 홍길동은 사실 그리 의인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가 활동했던 충청도 지역에서는 홍길동이 도둑질한 뒤로 유망민이 늘어 세금을 거두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전해지기까지 했다. 게다가 ‘탐관오리’와의 결탁으로 부를 축적하기까지 했던 그야말로 ‘도둑놈’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홍길동을 실존 인물로서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억하는 홍길동은 소설 《홍길동전》에 나오는 의적 홍길동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판타지 소설’이라고 자신있게 자부할 만한 바로 그  《홍길동전》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 홍길동은 원조 코리안 ‘슈퍼 히어로’다. 태생부터 ‘곡절’이 가득한데, 심지어 당대 승상이었던 홍문과 몸종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다. 서자였음에도 비범한 태몽, 그리고 탄생의 과정을 가지고 있었다. 홍문이 여성과의 정사 이전에 ‘청룡’이 나오는 꿈을 미리 꾸고, 태몽임을 직감한 상태에서 몸종과 동침해서 낳은 아이가 홍길동이었던 거다.

홍길동이 당대 최고의 슈퍼 히어로일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했다. ‘노비의 자식’이라는 혈통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율도국이라는 새로운 이상향을 건설하는 희망 섞인 ‘판타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이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만들어진 《홍길동전》이라는 소설이 마치 신분제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과 왕조체제를 넘어선 대안적 메시지를 주는 소설은 아니다. 세계사적으로 그런 ‘판타지 소설’이 있었나 싶지만, 아무튼 《홍길동전》은 사람들이 당시 꿈꾸고 싶어하는 ‘환상’ 훌륭히 담아낸 대중소설이었음에는 틀림 없었다.

조선 후기 부조한 현실 속에서, 신분제적 모순에서 올 수 있는 소외감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서열’을 주인공을 했다는 점, 그리고 당시 가장 문제가 만연했던 부조리한 탐관오리에 대한 해학 넘치는 비판까지 담고 있었으니 사람들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카타르시스는 실로 엄청났던 거다. 게다가 미천한 ‘얼자’ 따위가 왕이 될 수 있다니? 이건 그야말로 ‘환상’의 끝에 도달한 소설이었던 거다. 그야말로 ‘판타지아’가 아니던가 말이다.

홍길동의 모험이 더욱 ‘환상적’일 수 있었던 건, 바로 그가 부리는 ‘도술’ 덕분이었다. 홍길동은 천근 짜리 초부석을 들고 걸어 다니며, 허수아비로 분신을 만들어 전국을 누비게 하고, 바람을 만들고, 종이에 비 우(雨)자 써서 날씨를 조종하기도 한다. 남들에게 환상을 보여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타노스 부럽지 않은 초능력자였던 거다. 이쯤되면 왜 마블이 홍길동전의 판권을 사지 않는지 의아할 정도다. 마블이 그토록 좋아하는 ‘교훈적’인 메시지까지, 그야말로 완벽한데 말이다.

홍길동의 ‘환상’이 조선을 사로잡자 그와 비슷한 ‘조선 히어로’들이 저 마다의 ‘환상’을 품고 등장했다. 《전우치전》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인공 전우치 역시 도술을 사용해 탐관오리를 규탄하고, 국가의 재물로 빈민을 구제하면서 왕을 농락한다. 특히나 전우치가 왕을 속인다는 대목에서는 ‘왕조의 권위’까지 비판하는 모습이었기에 읽는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판타지’를 심어 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농락의 전 과정이 너무나도 가볍고, 유쾌하기까지 하니, 현실의 어두움 속에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느꼈을 희열은 곱절이었을 테다.

🎈‘인터넷’이라는 마법 속에서 상상한 한국적 ‘판타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근대 이후 한국에서는 ‘판타지’라는 장르가 오랜시간 대단히 저평가되어 왔다. 홍길동을 상상하고, 전우치를 만들어 낸 조선이 망하자, ‘환상’을 꿈꾸던 순수함은 사라지고, 현실의 엄혹함에 숨을 죽여야 하는 시절로 들어선다. 순수문학에 대한 문학계의 강한 집착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대중들조차 ‘판타지’라는 장르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엄혹하고, 어두운 현실을 ‘허무맹랑한 이상’으로 극복하기 힘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꿈’과 ‘희망’이 사치로 느껴졌던 팍팍한 일상 때문이었을까? ‘환상’은 ‘사치’가 되었고, 그렇게 ‘판타지’는 ‘유치함’이 되었다.

그러던 1990년대를 맞이한 한국이었다. 엄혹했던 사회는 나름의 자유를 찾았고, 팍팍한 주머니 사정은 안정을 찾아갔다. 사람들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고, ‘희망’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한국인들의 ‘환상’을 공유할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렇다. 바로 PC통신이다. 한국의 ‘판타지 소설’은 그렇게 부활했다. 특히나 이영도 작가가 집필한 《드래곤 라자》의 폭발적인 인기가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는 근대 이후 한국식 ‘판타지 소설’을 만든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만한 작품으로, 상업적인 측면에서나 문학적인 평가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한국에서 창작한 ‘판타지 소설’이 다시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작품으로 전 세계적으로 210만 권이나 팔려나갔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한국에서 “통신문학”이라는 장르가 개척되는 데 선두주자 역할을 했다는 부분이다.

그렇다. 한국에서 ‘환상’을 이야기하는 공간이 옮겨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작품을 필두로 이제 한국에서 ‘환상’은 텍스트에만 갇혀 있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게임으로, 만화로 ‘환상’은 더 다양한 콘텐츠로 옮겨 붙었고 ‘꿈’의 크기는 더욱 커져 갔다.
하지만 커지는 ‘꿈’과 확장된 콘텐츠 시장 속에서도 한국의 ‘판타지’는 제대로 날개를 펴지 못한 채 쭈그리고 있어야 했다. 꿈을 꾸는 건 더 이상 ‘사치’가 아니었지만, 그 꿈의 무게는 여전히 가볍고, 유치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판타지’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꿈’은 그저 중고생이 머리나 식힐 때 안성맞춤인 콘텐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는 법, 그저 머리나 식힐 때 ‘판타지’를 접했던 이들은 어느덧 성인이 되었다. 그들은 학창시절 ‘꿈’꾸는 방법은 ‘판타지’에서 배웠다. 그렇게 ‘판타지’는 자연스럽게 주류 문화로서 급부상 할 수 있었고, 한국은 다시 ‘환상’을 콘텐츠에 덧입히기 시작했다. 통신문학은 웹툰으로 이어졌고, 웹툰은 다시 게임으로 만들어졌으며, 그렇게 유치한 ‘환상’은 각종 드라마와 영화에 침투했다. 한국 콘텐츠의 메인스트림에 ‘환상’이 자리잡게 된 거다.

🎈K-콘텐츠의 미래는 ‘환상’에 있다?

2018년 웹소설 시장규모는 4,000억 원이며, 이를 종이책으로 환산하면 약 3,000만 권의 판매 규모다. 한 해 종이책 소설 판매 권수가 약 1200만 권이라고 할 때, 웹소설의 시장규모는 종이책 소설 시장의 약 2.5배에 달한다. 웹소설 시장에서 판타지 콘텐츠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겠다.

사실 이 통계는 시장의 변화가 아니라, 확장을 말해 주는 통계다. “출판시장이 죽어가고 있어” 따위의 암울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통계결과가 아니라는 말이다. 웹소설 시장뿐이겠는가. ‘판타지’의 유행은 이제 단순히 ‘소설판’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콘텐츠 시장에서 ‘환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성공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예상가능한 전개였다. 물론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한국 판타지 소설은 아니지만,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한 빗장을 한국적 판타지에서 스스로 풀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종이책 출판이 아닌 다른 콘텐츠에서는 이미 ‘K-판타지’가 엄청난 인기몰이 중이라는 건 상식이다.

특히 한국 판타지 콘텐츠 특유의 모험에 대한 집착은 다양한 콘텐츠로 확장되기 알맞다. 애초에 ‘한국적 판타지 소설’의 시작이 게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며 시작했고, 서로의 활용은 마치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인터넷, 온라인 게임, 그리고 판타지 소설은 서로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왔다는 말이다. 여기에 웹툰과 드라마, 영화까지 더해졌으니 앞으로의 발전이 더욱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어쩌면 ‘K-콘텐츠’의 미래가 ‘환상’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홍길동이 조선 팔도를 호령하던 그때를 넘어, 새로운 홍길동이 마블을 대체해 전 세계를 사로잡을 날이 곧 올지도 모르겠다.

Editor.🍜브로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한 것으로도 모자라, 대학원에서까지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공부한 내용을 사람들과 나누고자 또래 연구자들과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역사공작단>이라는 팟캐스트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중 역사로 돈을 벌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인문학 콘텐츠를 생산하는 ‘스타트업’을 창업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여러 대학을 전전하며 시간강사로 돈도 벌고, 제 이름의 유튜브 채널 <역발놈 김재원>을 운영하며 ‘지식중개사’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중입니다. 저서로는 《4.19혁명을 묻는 십대에서》가 있으며, 공저로 《한뼘한국사》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쉽게 읽는 서울사 : 현대편》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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