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셰익스피어인가?

키워드로 공부하는 요즘 인문학 : 셰익스피어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에 대해 논할 때면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등 흔히 알려진 유명 작품을 떠올리곤 한다. 그렇다면 한 개인으로서의 셰익스피어는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그의 출생과 가족사에서부터 배우 활동은 물론 대필설 논란까지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다양한 내용을 살펴보며 ‘왜 셰익스피어인가’라는 주제의 해답을 찾아가보자.

스트랫퍼드, 셰익스피어를 배출하고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다!

셰익스피어의 동상

영국의 국민시인 셰익스피어는 1564년 4월 23일 스트랫퍼드 어폰에이번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퍼드는 주민들이 주로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던 작은 시골마을이었는데, 셰익스피어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늘날 한해 무려 6백만 여 명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마을 자체가 관광화가 잘 되어 있어서 셰익스피어의 생가나 홀리트리니티 교회 등 역사적 명소 답사뿐만 아니라 강가 공원에서 여유 있는 소풍을 즐기거나 왕립 셰익스피어 극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셰익스피어 공연도 관람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아버지 존은 스트랫퍼드에서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장갑 등의 가죽제품을 만들어 파는 평민이었는데 셰익스피어가 4살이 된 1568년에는 스트랫퍼드의 읍장이 될 만큼 명망 있는 인물이었다. 어머니 메리는 숲을 하나 통째로 소유하고 있을 만큼 부유한 아든가의 딸이었다. 존과 메리는 총 8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첫째와 둘째딸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둘 다 병으로 죽어 셋째로 태어난 셰익스피어가 장남이자 첫째가 된다. 아래로 동생이 5명 있었는데 잡화상이었던 길버트, 모자장수와 결혼해서 (그 당시 평균 수명이었던 35세를 훨씬 초과하는) 77세까지 장수한 여동생 조운, 7살 때 죽은 여동생 앤, 딱히 알려진 것이 없는 남동생 리차드, 연극 배우가 된 막내동생 에드먼드가 그들이다. 참고로 ‘에드먼드’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에 등장하는 악한 서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의 부인이 앤 해써웨이라고?

시간이 흘러 18세가 된 셰익스피어는 1582년에 8살 연상이었던 앤 해써웨이와 결혼한다. 앤은 부모를 일찍 잃어서 부모의 간섭 없이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결혼한 지 6달 만에 첫째 수잔나가 태어났으며 그 2년 뒤인 1585년 쌍둥이 주디스와 햄닛이 태어났는데, 3명의 자녀 중 유일한 아들이었던 햄닛은 10살 때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런던으로 건너가 연극계에 종사했으므로 자주 집에 오거나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와 그의 가족이 묻혀 있는 홀리 트리니티 성당

추가로 셰익스피어와 두 딸 간의 관계도 흥미로운데, 첫째 수잔나는 24세에 의사 존 홀과 결혼을 하고 둘째 주디스는 당시로서는 다소 늦은 31세에 자신보다 4살 어린 술장수 토마스 퀴니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사망 한 달 전, 동네에서 미혼 여성이 아이를 낳다가 산모와 아이가 둘 다 죽은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다. 아이의 아빠는 바로 결혼한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던 셰익스피어의 둘째 사위 토마스 퀴니였고, 이 사실은 그의 자백을 통해 공식적으로 밝혀지게 된다.

셰익스피어 부녀간의 관계가 작품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에 대해 궁금해질 수도 있는데, 셰익스피어가 작품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가족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잘 없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희곡의 줄거리를 직접 창작한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나 연극의 내용을 각색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반전에 반전, 배우 활동까지 섭렵한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는 160편의 시와 37개의 희곡 작품을 남긴 영국을 대표하는 문인인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실은 그가 자신이 쓴 연극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1580년대 중반에 런던으로 와서 연극계에 발을 들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연극인으로서의 활동과 관련된 첫 기록은 그에 대한 비방이었다. 극작가 로버트 그린은 셰익스피어를 ‘우리의 깃털로 치장해서 갑작스레 출세한 까마귀(upstart Crow, beautified with our feathers)’라고 표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을 했던 로버트 그린은 극작가로서의 자신의 업적보다는 천재 작가를 질투심에 사로잡혀 폄하한 인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진실 혹은 거짓. 셰익스피어가 대필을 썼다고?

아마도 셰익스피어 대필설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한 번 정도는 매체를 통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셰익스피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의 작품을 대신해서 작품을 썼다는 역사적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 우선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들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시골마을 출신에 문법학교(오늘날로 따지면 중고등학교 정도)를 졸업하고 대학교육은 받지 못한 평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설은 1786년 옥스퍼드대학 출신의 학자 제임스 윌못이 셰익스피어에 대한 기록의 부재와 그의 생애와 작품 간의 괴리에 대한 의구심을 품으면서 시작됐다. 그는 동시대 귀족이었던 프란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썼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후 19세기에는 미국의 극작가 델리아 베이컨이 이 가설을 강하게 지지했고, 20세기 초에는 영국의 존 루니가 옥스퍼드백작을 실제 저자로 옥스퍼드 백작을 지목하기도 했다. 헬렌 켈러, 지그문트 프로이트, 헨리 제임스, 마크 트웨인 등 많은 유명 인사들도 이러한 주장을 지지했고 실제로 영국과 미국에서 셰익스피어 저작 여부를 놓고 공식 재판이 두 번이나 벌어질 정도로 국제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물론 두 재판의 결과는 모두 셰익스피어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대필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들의 공통점은 모두 부정적인 추론, 즉, 셰익스피어의 배경과 생애가 그의 작품에 담겨진 지식과 경험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지적만 있고 다른 사람이 그의 작품을 대신 썼다는 긍정적인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재판부는 셰익스피어의 손을 들어줬다. 대부분의 셰익스피어 학자들 또한 이러한 가설을 터무니 없는 것으로 일축하기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썼다는 것에 대한 의문은 굳이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이러한 주장에 공감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셰익스피어가 그의 평범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뛰어난 극작가가 되었는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지식으로 제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끝으로 셰익스피어를 ‘천재 작가’라고 우러러보는 방식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생의 여러 이야기들을 연극적 상상력으로 무대 위에 풀어낸 대중적인 극작가로 생각하고 접근하면 좋을 듯하다. 그리고 모든 희곡이 그렇듯 원래 공연을 위해 쓰인 것이기 때문에 책으로 읽는 것도 좋지만 가까운 극장에서 공연으로 좀 더 재미있게 즐기기를 추천한다.

첫 번째 키워드 소개자
최석훈ㅣ서울시립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영미희곡 전공)

키워드 인문학을 만드는 사람
허인영ㅣ한국사를 비롯한 교양 인문학 좋아하는 평범한 요즘 대학생입니다. 사람 만나 대화 나누는 걸 정말 좋아하는데요. 저와 함께 '요즘 인문학' 공부해보시면 어떨까요?
오유빈ㅣ콘텐츠의 힘을 믿습니다. 또, 언제나 재미있는 콘텐츠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글도, 영상도 물론 좋지만 대화가 가진 깊이는 또 다른 법이죠. 여러분도 이 대화에 함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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