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격변의 동아시아, 그 한 가운데 몽골과 고려가 있었습니다. 12세기 말 이래로 세계를 정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과 무신정권이 권력을 휘어잡고 국왕을 농락하던 고려. 둘은 결국 전쟁을 통해 새로운 외교 관계를 맺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 시기, 이른바 ‘원 간섭기’라고 불리던 그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원 나라 황실에 기대어 강력한 왕권이 회복된 시기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원세력’에게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시절이죠. 고려는 이 ‘암흑기’를 어떤 외교술로 이겨냈을까요?
📃홍복원, 질긴 인연의 시작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그러니까 대원제국의 황제 원 세조 앞에 1279년 1월 고려 출신의 두 사람이 언쟁을 벌였습니다. 바로 고려의 25대 왕 충렬왕, 그리고 홍차구였죠. 한 나라의 왕과 그 나라 출신의 인물이 원나라 황제 앞에서 말다툼을 벌였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책의 저자인 안정준은 세계 제국 원나라와 고려의 외교 관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바로 이 희한한 사건으로부터 출발시킵니다.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1231년 8월 몽골이 고려를 침공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시작됩니다. 이 시기 고려의 진짜 주인은 고려 국왕이 아니라 무인 집정자 최우였죠. 고려 본토가 쑥대밭이 되는 순간에도 최우는 강화도에 틀어박혀 앉아 있었고, 국왕은 그 상황을 지켜봐야 했죠. 바로 이때 홍차구의 아버지 홍복원이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홍복원은 고려 서북방 지역이었던 인주 출신이었습니다. 인주는 고려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고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죠. 고려는 이때 이곳에 중앙군을 파견하고 홍씨 집안으로 하여금 몽골군의 침입을 막도록 했었습니다. 하지만 홍복권의 판단은 재빨랐습니다. 1,500호의 해당 지역 고려 백성들을 이끌고 몽골에 투항한 것이죠.
그런데 홍복원의 항복은 단순한 투항의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홍복원은 몽골군을 따라 다니며 전투가 치러지는 곳에서 향도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죠. 심지어 전투가 몽골에 불리하게 돌아갈 땐 스스로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고려에 맞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홍복원의 아버지와 처자, 그리고 동생까지 강화도에 끌려가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후 홍복원은 고려를 완전히 버리고 몽골로 도망치게 되죠.
이때부터 홍복원은 그야말로 몽골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몽골의 입장에서 홍복원은 꽤나 쓸만한 인간이었습니다. 홍복원이 이끌고 온 고려인들의 농사기술이 필요했던 거죠. 몽골은 이들을 요양과 심양지역에 정착시키고 농사짓고 살게 합니다. 그리고 홍복원은 이들을 관리하는 책임자가 되죠. 게다가 홍복원은 차후 있을 고려와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몽골인 홍복원은 몽골의 고려 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몽골군의 맨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약탈을 서슴치 않았으며, 전리품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죠. 이 과정에서 고려인들은 학살당하거나 산채로 몽골에 끌려 갔습니다. 몽골에 끌려간 고려인들은 다시 요양과 심양지역으로 옮겨져 농지를 개간하는 일에 쓰였고, 그곳에서 얻은 수익은 모두 홍복원의 차지였죠. 홍복원 입장에서 몽골과 고려의 전쟁은 그야말로 ‘노다지’였던 겁니다.
홍복원은 이 과정에서 몽골 황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승승장구 합니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죠. 바로 고려 왕족 왕준이 인질로 있는 13년 동안 몽골의 황제 몽케 칸과 가까워졌던 겁니다. 왕준은 몽케 칸의 신임을 얻어 홍복원이 관리하던 심양 지역의 2,000여 호를 관리하기에 이릅니다. 둘은 점점 경쟁 관계가 되어 갔죠.
홍복원은 왕준을 향한 저주의 굿판을 벌이기에 이르렀고, 이를 보고 받은 황제는 사실관계를 캐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홍복원은 왕준에게 뛰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왕준의 부인이었죠. 왕준의 부인은 몽골의 황족이었습니다. 소란이 커졌고, 왕준의 부인은 황제에게 이 사실을 고합니다. 그리고 홍복원은 길거리에서 맞아 죽습니다.
📃홍차구, 진짜 괴물의 탄생
홍복원이 죽고 몽골에서 홍씨 가문의 역할은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 홍차구는 아버지의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몽골 내부의 사정, 그리고 몽골과 고려의 사정이 변하고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용한다면 홍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죠.
몽골은 몽케 칸이 남송 원정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하자 칸 계승권을 둘러싸고 엄청난 내홍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고려는 몽골과의 오랜 전쟁을 끝내기 위해 태자였던 왕전을 몽골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죠. 동아시아의 정세가 완전히 바뀌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태자 왕전과 강력한 칸 계승권자였던 쿠빌라이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죠. 둘은 급격히 가까워졌고, 쿠빌라이가 황제가 되자, 고려 왕실과 끈적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홍차구는 몽골의 황실과 고려 왕실의 로맨스를 달가워 하지 않았죠. 두 나라 간의 전쟁으로 가세를 쌓아올린 홍씨 집안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꿈구며 홍차구는 쿠빌라이에게 “고려가 항복한다고 한 건 다 거짓말입니다!”라며 편지까지 썼지만, 이미 둘의 관계는 원만하게 봉합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몽골의 입장에서 완벽하게 고려를 믿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아직 반몽골 세력이 조정에 남아 있는 상황이었고, 게다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계속 늦추고 있었죠. 이 상황에서 홍차구는 꽤 쓸모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쿠빌라이는 심양과 요양 지역의 총관직을 다시 꿰차게 됩니다. 고려를 감시하는 역할을 홍차구에게 맡겼던 거죠.
고려 내부에서 반몽골 세력의 항거가 있을 때마다 홍차구는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쿠빌라이의 신임을 더욱 커질 수 있었죠. 결정적인 역할은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것이었습니다. 교과서에 ‘민족항쟁’으로 묘사되곤 했던 그 삼별초의 난이었죠. 홍차구는 삼별초를 제압함으로써 쿠빌라이의 신임을 얻음과 동시에 아버지의 복수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키며 왕위에 앉혔던 자가 바로 왕준의 친형 왕온이었기 때문이죠. 끝내 홍차구는 왕온의 목을 베어버립니다.
게다가 삼별초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붙잡은 고려인들을 무참히 포로로 잡아 몽골에 보내버리거나, 노비로 팔아버렸죠. 무고한 고려의 백성들이 몽골에 팔려나가는 동안 고려의 국왕이었던 원종은 이를 막아낼 능력과 힘이 없었습니다. 홍차구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더욱 잔인하게 고려인들을 괴롭혔습니다.
홍차구의 막장 짓은 몽골의 일본 원정 과정에서 극에 달합니다. 지리적으로 몽골의 일본 원정을 위해서는 고려가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때 홍차구는 일본원정을 책임자는 ‘감독조선관군민총관’가 되어 기술자와 인부 3만 명을 부리는 일을 합니다. 30년이 넘는 전쟁이 막 끝난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노동력과 군량이 착출 되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홍차구의 손에서 시작되었죠.
고려 국왕 원종은 이를 지켜만 볼 수 없었습니다. 상황을 역전시킬 한 방이 필요했죠. 그가 선택한 건 몽골 황실과 고려 왕실 간의 결혼이었습니다. 본인의 아들 왕심과 쿠빌라이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를 혼인 시키고자 했던 겁니다. 쿠빌라이는 이전의 끈적했던 관계 원종과의 관계를 생각해 원종의 혼인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고려 왕실은 몽골 황실의 부마가 되었고, 몽골 내에서 고려 왕실의 위상은 급격히 상승했죠. 고압적이기만 했던 몽골의 사신들도 고려 국왕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쿠빌라이의 사위로서 고려 국왕이 된 인물이 바로 충렬왕입니다. 바로 이때 홍차구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본인의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잘 생각해봐야 했죠. 제국대장공주를 부인으로 둔 충렬왕은 이제 홍차구가 감히 비빌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된 겁니다. 고려에서 본인의 입지도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죠.
📃홍씨 일가와 고려 왕실이 맞붙다
몽골과 고려의 관계가 안정화되자 홍차구의 이용가치는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홍차구에게도 뭔가 이 상황을 반전시킬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죠. 바로 이때 고려에서 “작은 사건”이 하나 벌어집니다. 고려의 충신이자, 몽골의 일본원정, 삼별초의 난 때 활약했던 김방경이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를 죽이고 몽골에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헛소문’이었죠.
홍차구에게는 이 소문이 헛소문이라고 하더라도, 이 문제를 크게 키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치 “군사정권” 때의 “공안검사”마냥 말이죠. 이 헛소문을 쿠빌라이에게 고하자, 쿠빌라이는 홍차구를 진상조사 차원에서 고려로 보내게 됩니다. 황제의 명을 빌어 홍차구는 김방경을 모질게 고문합니다. 거짓 자백이라도 받아내 황제에게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죠. 그래야 충렬왕의 통치 능력에 스크레치가 갈테고, 본인의 입지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여긴 헙니다.
하지만 김방경은 꼿꼿했고, 반역을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집을 탈탈 털어서 나온 물증이라곤 갑옷 46벌 뿐이었죠. 홍차구는 그 갑옷 46벌을 증거라고 들이밀며 쿠빌라이에게 김방경을 반역죄로 기소합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쿠빌라이는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충렬왕과 김방경을 몽골로 불러들입니다.
바로 이때, 충렬왕은 참아왔던 불만은 제대로 터트립니다. 황제의 사위임을 앞세워 홍차구를 비롯해 고려 왕실을 모함해 몽골에 빌붙어 먹으려는 이들을 한 번에 정리하고 했던 것이죠. 충렬왕은 홍차구를 몽골로 소환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행여나 고려에 대한 의심이 들거든 강화도에 몽골군을 주둔시키라고 말해버립니다. 충렬왕의 거칠고 강경한 태도에 쿠빌라이는 “우리 사위가 고생이 많았군”이라고 생각하며 고초를 위로해줍니다. 그리고는 고려로 돌려 보냈죠.
충렬왕은 이 한 번의 알현으로 홍차구와 몽골군의 전면 철수라는 외교적 성과를 얻어 냅니다. 게다가 홍차구와 몽골군이 떠나는 과정에서 함부로 고려인을 데려가지 못하게 조치까지 취해버립니다. 게다가 충렬왕은 고려로 돌아오자마자 홍차구가 기존에 포로로 잡아두었던 고려인들을 풀어주고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이들을 처형시켜 버렸죠.
이대로 참을 수 없던 홍차구는 다시 쿠빌라이 앞에 나가 “충렬왕이 무엇인가를 꾸미기 위해 몽골의 충신을 죽이고 있습니다!”라고 일러 바치게 됩니다. 귀가 얇았던 쿠빌라이는 다시 충렬왕을 몽골로 불러들입니다. 충렬왕이 몽골에 다녀온 지 두 달 만의 일이었죠. 그렇게 둘은 쿠빌라이 앞에서 대면했고, 기싸움을 벌이게 되었던 겁니다.
📃고려 왕실의 대반격
쿠빌라이 앞에서 선 둘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을 펼칩니다. 자신의 말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소 격앙된 표현을 써가며 황제 앞에서 진실 공방을 벌였던 겁니다. 여기서 충렬왕은 회심의 한 방을 날리죠. “듣자 듣자 하니까, 네가 뭔데 고려 조정 일에 일일이 간섭을 하는거야?”라는 묵직한 한 방이었습니다.
지켜보던 쿠빌라이는 “알았고, 다음부터는 나한테 보고하고 처리해. 돌아가 봐”라면서 상황을 급히 정리해버립니다. “다소 맥이 빠지는” 판결이었죠. 하지만 충렬왕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판결은 없었습니다. 더 이상 이 문제로 책임을 물을 일은 없어진 것이니까요. 사실상 충렬왕과 홍차구의 싸움에서 충렬왕이 확실한 승기를 잡게 된 것이었습니다.
홍차구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카드는 몽골의 2차 일본 원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저도 충렬왕이 실질적인 총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 입지는 줄었고, 2차 원정마저 실패로 돌아가면서 홍차구는 4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들의 자손들도 어떻게든 몽골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황실에 줄을 댔지만, 결과적으로는 몽골 황실의 부마였던 고려 왕실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주변 정세 변화를 기막히게 읽어내는 능력으로 한때 고려 국왕의 권한을 넘보기까지 했던 홍씨 가문은 그렇게 쓸쓸하게 사라져 갔습니다. 수 대에 걸쳐 고려 국왕과 대결하며 승승장구하던 홍씨 가문도 몽골 황실과 결혼으로 엮인 고려 왕실에게는 비빌 수 없었던 겁니다.
어떤가요?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해오던 원 간섭기 고려의 모습과는 조금 달라 보이나요? 여전히 고려 왕실의 선택이 그저 ‘치욕적인 반민족적 행위’로만 그려지나요? 외교라는 건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때도 마찬가지죠. 책의 저자인 안정준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지금의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현 상황에서 고려 왕실이 선택한 외교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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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아니라, 이런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 몽골은 어떻게 세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 몽골이 제국을 건설할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어땠을까?
- 고려 왕실이 선택한 ‘부마국(駙馬國)’의 지위는 치욕이었을까?
-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 홍씨 가문의 선택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 고려 왕실이 몽골과 혼인으로 엮이지 않았다면 어떤 역사가 펼쳐 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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