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부터 역사를 통한 구원으로

“누구나 살면서 감기에 걸리듯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병을 앓는다. 그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발병하는 실존적 감기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주는 기능을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역사학자 김기봉 선생의 글에 있는 구절을 발췌해 보았습니다. 21세기, 자본주의의 고도화, 기술발달의 고도화로 상징되는 지금을 살고 있는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와 같은 삶의 무의미함을 느끼는 것을 존재의 가벼움 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존재의 가벼움 이라는 감기에 걸렸을 때, 인간과 관련된 근원적인 가치문제를 다루는 인문학이야 말로 그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인문학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인문학의 총화인 역사를 학습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은 빈부격차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이러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인간만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이유라고 본다면, 역사학은 이와 같은 성찰을 지나간 과거를 통해서 간접 경험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또한 모두가 죽어야 할 존재라면, 살아있는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와 관련된 방향을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지요.

다시, 왜 기억해야 하는가

다시 1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애당초 역사가 왜 쓰여지기 시작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1장에서 보았던 헤로도토스와 공자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은 망각의 반대말입니다. 역사는 망각을 방지하기 위해 쓰여지기 시작했고, 난신적자를 두려움에 떨게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했다면, 왜 잊지 말아야 할까요?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지 않았고, 때문에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 겪지도 않은 그 시대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고, 이는 현재 일본에 대한 태도를 취하는데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한국인이 가지는 일본에 대한 ‘집단기억’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모든 존재를 소멸시키는 시간을 극복하여 기록을 남기고 이를 통해 선대의 기억을 후대에 전달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이 기억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까지 지속될 인간 삶에 교훈이 될 만한 작용을 하길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식입니다. 결과적으로 역사학습의 목적은 개개인과 집단이 역사의식을 갖는데 있습니다. 역사의식은 자기 존재의 기원과 의미를, 과거와 미래로 확장시켜 성찰하는 지적 능력을 가리킵니다.

2019년 8월 현재의 대한민국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나라이며, 지금과 같은 한일관계의 갈등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탐색하는 것은 1965년 한일회담의 내용과 성격,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며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과 일본군 성노예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다시 1910년 국권이 피탈되던 때의 시대상황의 이해, 전세계를 휘감은 산업화와 자본주의로 이룩한 제국주의와의 관계로까지 끊임없이 상고해가며 사고하는 작업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전개의 과정과 인과관계를 이해하고 나름의 판단을 내리며 가치판단의 기준을 세울 수 있게 하는 것, 이러한 각성의 출발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역사를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답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학습합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은 잘못한 것에서도 배우겠다는 말입니다. 역사는 정치적으로 가장 많이 활용됩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지요. 조지오웰의 소설 『1984』의 구절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도를 최근에 온몸으로 경험했지요. 바로 박근혜 전대통령이 추진했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파동입니다. 후대에 이 사건이 ‘파동’이나 ‘사태’로 기록될지, 아니면 ‘추진’과 같은 단어로 기록될지 궁금합니다. 좌우간 이 사건은 바로 역사의 효용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입니다. 역사를 학습하는 목적은 미래를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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