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글로벌 산업은 무엇일까?: 19세기 면산업의 성장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1300년대 말, 면화는 이미 세계 각지에서 재배되고 있었습니다. 인도, 중국, 남아메리카, 인도네시아, 서아프리카 등 온 세계의 농민들이 면화를 활용해 실을 잣고 면을 짰죠. 밤이나 농한기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농민들에게 여유 시간을 활용해 실을 뽑거나 면직물을 짜는 일은 중요한 소일거리가 되어주었습니다. 면직물의 생산량이 계속해서 증가하면서 사람들은 잉여생산분을 거래하거나 화폐로 사용했죠.

늦어도 1000년 무렵부터 1800년 전까지 면직물의 글로벌 시장을 지배했던 것은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었습니다. 특히, 인도의 면직물은 “바람결로 짠 거미줄”이라고 불리며 중국, 동남아시아, 아랍, 아프리카, 그리고 지중해까지 유통되었죠. 하지만 면직물 시장은 19세기 전까지 몇 가지 제약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기술적 진전은 있었지만 생산성의 증가가 미약했고, 완제품을 소비하는 시장도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죠. 원거리 무역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많았습니다.

유럽은 국제적 면 시장에서 오랜 기간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중세의 유럽인들은 면화를 ‘양이 열리는 식물’이라고 믿었죠. 십자군 전쟁 이후에야 아랍과 아시아에서 면화와 방적·방직 기술이 수입되었고 이탈리아 북부와 독일 남부에서 면직물 생산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중해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따라 면화의 수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죠.

변화는 자본과 국가권력의 결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7세기 등장한 유럽의 재정군사국가와 상인계층의 동맹이 면직물의 글로벌 시장을 유럽 중심으로 재편했던 거죠. 국가는 안정적인 금융시스템과 상인에게 우호적인 법률체제를 확립해 원거리 무역을 보장했습니다. 식민지를 확보해 아프리카에서 공급된 노예들이 일할 광활한 면화재배지를 제공해주기도 했죠. 무엇보다 국가는 강력한 해군을 건설해 해양무역로를 확보하고 상인들을 도왔습니다. 국가권력의 지원을 받은 상인들은 전세계의 시장으로 수출되는 면직물의 유통을 거의 독점할 수 있었죠. 인도의 면직물을 내다팔았던 건 아시아의 상인들이 아니라 유럽의 상인들이었습니다. 다른 문명의 상인들은 여러 방식으로 제거되었어요.

1766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영국으로 들여온 무역품 중 75% 이상이 면직물이었습니다. 인도산 면직물은 유럽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영국 상인들은 인도의 생산과정에 더욱 깊게 개입하기 시작했죠. 영국은 동인도회사와 군대를 앞세워 인도의 주요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상인들은 유통을 넘어 아예 그곳에서의 면직물 생산까지 독점하기도 했어요. 원하는 양만큼 안정적으로 면직물을 공급하기 위해서였죠.

면직물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을 지켜보던 일부 상인들은 영국 본토에서 면직물을 생산해 이득을 보려 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인 서인도제도로부터 막대한 면화가 들어오고 있었고, 영국의 농민들도 면화에서 실을 뽑고 직물을 짜는 소일거리에 맛을 들리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을 잘 조직해 면화와 방적·방직 도구를 주고 실과 면직물을 생산하게 하면 큰돈을 벌 것 같았죠.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던 리버풀에서 이러한 사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이 제조업자들은 국제시장에서 명품으로 여겨졌던 인도산 면직물의 ‘짝퉁’을 만들거나 산업스파이를 파견해 기술을 훔쳐오는 등 온갖 노력을 펼쳤지만, 여전히 유럽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 생산성을 높이지는 못했어요.

생산성의 향상은 기계의 도입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이 세계 최대의 면직물 생산국으로 거듭난 것이 위대한 기술의 발명 덕분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방적·방직 기술의 개선은 1815년까지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아시아산 면직물이 유럽산 면직물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앞서 있었죠. 저 기술들에는 미래가 있다고 믿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국가가 없었다면 생산성의 개선은 제한적이었을 겁니다. 나아가 유럽의 정부들은 자신들이 아시아의 기술을 훔쳐갔듯 다른 나라들이 유럽의 기술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하는 법들을 통과시켰죠. 국산품을 보호하는 관세 등 수많은 조치도 병행되었어요.

이러한 국가의 보호 아래 방적과 방직 작업은 점차 기계화되어 갔고 공장이 설립되고 노동자들이 고용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영국 면공업의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어요. 1770년 영국 전체 경제에서 면공업이 차지한 비중은 2.6%에 불과했지만 1831년에는 22.4%에 달했죠. 1780년 이후 영국의 면직물 수출은 거의 200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기술의 발명이 산업혁명을 낳았다는 서사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산업혁명에 관한 이야기는 대개 증기기관의 발명에서 시작하죠. 하지만 수백년동안 면직물의 국제시장에서 소외되어 있던 유럽을 중심지로 부상하게 한 요인은 기술의 발명이 아니라 전쟁과 수탈을 통해 확보한 무역 네트워크였습니다. 국가와 결합한 상인들이 면직물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기계를 구입할 투자금을 모으고 기술을 빼오고 그 모든 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 과정은 금융시스템에서 시작해 특허권법에 이르는 부문에서 정치와 경제가 긴밀히 결합하는 과정과 병행되었습니다.

자, 이렇게 면 ‘공업’의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면직물 제조의 원료인 면화에 대한 수요도 갑자기 증가했겠네요. 그런데 인력에 기반한 면화농업에서 기계로 인한 생산성의 증가와 필적할 만큼 급진적인 생산성 향상이 가능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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