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사회의 위기와 변화

14세기에 들어서 유럽에는 두 가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는 농업생산력 저하와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의 급격한 감소였고, 다른 하나는 백년전쟁 등 대규모 전쟁의 발발이었습니다. 이 사건들을 겪으며 유럽은 중세의 토대였던 영주제와 기사 중심의 전투 방식을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의 변화는 유럽이 근대로 나아가는 길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중세의 인구는 1300년경 정점을 찍었습니다. 늘어난 입을 채우기 위해 농민들은 이전까지 경작하기 않았던 토지를 개간해야 했죠. 하지만 안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죠. 새로운 토지들은 이전의 토지보다 생산력이 많이 낮았습니다. 게다가 개간하기 쉬운 방목지부터 철거했기 때문에 가축의 숫자가 줄어들었고, 가축의 힘을 빌릴 수 없게 되자 농사 짓기는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물론 고기나 유제품 소비도 줄었겠죠. 이러한 한계에 부딪혀 중세의 인구는 하락국면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흑사병이 발병해버려요.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교역로를 따라 중동으로 다시 베네치아로 흘러들어왔고, 서유럽 인구의 1/3이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받았지만, 농촌사회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농민들이 죽었고 또 병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여기서 영주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상시에 영주는 두 가지 방법으로 영지를 관리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임대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영주는 지역 농노들에게 땅을 임대해주고 임대료를 노동력으로 받아갔습니다. 인신적인 강제를 통해 직영지에 와서 농사를 짓도록 부역을 시켰던 거죠.

그런데 12, 13세기의 인구의 팽창국면에서 영주는 임금노동자를 고용해서 직영지에서 일하게 하고 농노들에게는 부역 대신 수확물로 임대료를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인구가 많아져 임금이 하락했고, 인구증가로 희소성이 커진 곡물의 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이었죠. 많은 영주들이 이런 방식으로 곡물을 모은 뒤 시장에 내다 팔아 부자가 되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갑자기 인구의 급격한 하락국면이 찾아오자 영주들은 패닉에 빠집니다. 직영지에서 일을 할 임금노동자 자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죠. 그렇다고 다시 농노들을 부역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다 도망가 버렸거든요. 결국 영주들은 직영지 대부분을 임대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나아가 곡물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면서 임대료도 현물이 아니라 화폐로 받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변화였어요. 영주와 농노들의 봉건적 관계가 임대계약으로 맺어진 지주-소작농 관계로 바뀌어버린 거거든요. 영주가 이제 단순 지주가 되었어요. 중세사회를 지탱했던 장원제가 몰락했던 거예요!

중세의 또 다른 기둥이었던 주종제도, 즉 왕과 기사의 관계도 14-15세기경 급격한 변화를 맞게 돼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116년 동안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지속된 백년전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한마디로 정리하면 전쟁에서 기사가 더 이상 쓸모없어졌기 때문이에요. 백년전쟁의 유명한 전투를 꼽으라면 1346년의 크레시 전투, 1355년의 푸아티에 전투, 1450년의 포르마니 전투를 들 수 있어요. 크레시 전투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처음으로 맞붙었던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언덕 위에 있는 잉글랜드군 군대를 향해 기사도 정신이 투철한 프랑스 중갑기병이 돌격했죠. 하지만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잉글랜드 장궁병이 쏜 화살에 맞아 다 죽었어요.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거의 동일한 양상이 펼쳐졌어요. 더 이상 기사들만으로는 전투에서 이길 수 없었던 겁니다. 참, 1450년에는 프랑스가 이겼어요. 대포를 썼거든요.

기사가 쓸모없게 되자 왕들은 원거리 무기로 무장한 보병을 구해야 했어요. 처음에는 용병을 썼죠. 하지만 용병은 지역민들을 괴롭히고 약탈하는 등 문제를 자주 일으켰어요. 그래서 만든 게 상비군입니다. 프랑스는 1445년 ‘칙령군’이라는 이름의 상비군을 창설합니다. 군대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돈이 들어가잖아요? 그전까지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에 의존했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은 백년전쟁 때부터 본격적으로 세금을 걷기 시작했고 이를 정기화시켰습니다. 세금 징수를 위해 관료제가 확립되기도 했죠.

또 한 가지. 잔 다르크가 프랑스에서 유명한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바로 ‘프랑스를 위해서 싸운다’는 생각이 생기고 인민들에게 전파된 게 잔 다르크 때문이었거든요. 그 이전까지 기사들은 전리품을 위해 싸웠어요. 인민들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고상한 도적떼와 다를 게 없었죠. 하지만 ‘신의 계시’를 받은 잔 다르크는 모든 명예와 보물을 버리고 오직 프랑스와 국왕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공공의 선’을 위해 싸웠던 것이죠.

영주와 농노, 국왕과 기사 등 사적 관계에만 의존해 있던 중세 유럽에서 이러한 ‘공’의 개념은 로마 시대 이후로 거의 처음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근대로 가는 길은 국가의 탄생과 공적 영역의 탄생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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