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사회: 성직자, 귀족, 농민

중세의 사회: 성직자, 귀족, 농민

앞에서 중세의 정치적 지형이 형성되는 과정과 경제적 토대에 대해 살펴보았죠. 이번에는 중세인들이 어떤 계층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아갔는지 알아봅시다.

중세의 삶은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종교적이었습니다. 게르만족 출신의 왕들이 통치 수단으로 기독교를 활용하면서 기독교 국가들이 세워졌었죠. 그와 동시에 교회는 유럽 곳곳에 예배당을 세우고 주교 등 성직자를 파견해 전유럽적인 조직을 갖추게 됩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속도는 정치적 권위가 지역사회에 스며드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랐어요.

중세 초에 교회는 정치세력이 가질 수 없는 영적인 권위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1세기 중엽에 클뤼니 수도원이 주도한 개혁운동이 분기점이 되었어요. 이 운동은 세속과의 결별을 통해 교회의 영적인 권위를 확보하려 했고 결국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교회가 성직매매와 성직자 결혼을 금지하고 추기경회의를 통해 독자적으로 교황을 선출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이제 성직자는 세속과 분리된, 유별나게 영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클뤼니(cluny) 수도원의 모습. 수도원 개혁의 중심지로 알려진 곳이다.

중세 교회는 어떤 기능을 했을까요? 우선 당연히 종교적 기능을 했겠죠. 교회는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설교와 미사 등 종교 행사를 주관했어요. 하지만 교회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교육, 경제,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성직자는 중세의 유일한 지식인 계층이었습니다. 책이 전부 라틴어로 쓰여 있었는데, 그걸 읽을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 성직자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수도원과 교회는 자연스레 교육기관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또한, 교회는 유럽 농지의 1/3 가량을 소유했던 거대한 지주이기도 했습니다. 교회와 수도원은 농노를 거느린 영주였고 성직자들은 농업 기술을 개량하는 데 기여하거나 농지를 운영했습니다.

중세 교회는 단순히 영적인 만족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개인들의 삶을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성직자를 규율하는 수많은 방법이 있었고 죄와 벌에 관한 갖가지 교리를 통해 개인의 도덕을 규율화 했습니다. 고해 성사, 결혼 성사 등의 방법을 통해 개인의 양심과 성생활까지 규제했고, 노동과 공정가격, 이자 등에 대한 규범을 제시해 사회의 경제윤리를 지도했습니다.

중세 사회를 규율하는 가장 강력한 위계인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일하는 자’의 3 신분 이데올로기도 교회의 발명품이었습니다. 잘 보시면 여기에 앞서 배운 부르주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주아 세력의 성장과 중세의 몰락이 이어져 있는지도 몰라요. 아무튼.

‘기도하는 자’는 물론 성직자 본인들이겠죠. 그럼 ‘싸우는 자’는 누구였을까요? 이들은 귀족계급, 흔히 ‘기사’로 알려진 남성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중세 초기에는 누가 기사인지 구분하는 게 힘들었어요. 말 타고 싸우는 이들 중 센 사람들이 대충 기사라고 여겨졌거든요. 이 잘 싸우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강력한 권력자와 주종관계를 맺어나가면서 영주와 기사의 관계가 정립되었습니다.

11-12세기에 사회가 안정되고 교회가 폭력을 규제하기 시작하면서 기사들은 사회적 계급으로 발전합니다. 직위와 봉토를 상속해 가문을 형성했으며 기사의 윤리, 이른바 기사도를 내세우면서 세련되고 성스러운 자태를 가지게 되었죠. 기사계급은 13세기에 이르러 더 많은 재산과 권력을 축적했고 우수한 혈통의 귀족 가문들과 사실상 구별이 힘들 정도로 합쳐지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기사의 군사적 기능이 중요하지 않게 되고 상인 중심의 부르주아들이 더 많은 부를 가지게 되면서 귀족계급의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일하는 자’인 농민들은 장원의 영주에게 귀속된 부자유한 존재였습니다. 고대로 치면 자유민보다는 노예에 가까웠죠. 영주는 자신의 봉토에서 사법을 관할하고 세금을 징수할 권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농노들은 영주가 부가하는 부역에 종사해야 했으며 인두세, 상속세, 혼인세 등을 물어야 했어요. 수확량의 1/3이나 절반가량이 세금으로 바쳐졌으며 나머지 중 일부는 다음 해에 파종할 종자로 남겨두어야 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삶은 그렇게 좋지 못했습니다.

10세기 이후 농업생산량이 증가하고 개간이 진행되면서 영주로부터 더 좋은 조건에 경작권을 받아가는 농민들이 늘어났고 이들은 고정된 지대를 납부하고 그 외의 인신적 구속에서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세의 농촌사회는 1500년에 이르기까지 장기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생산량과 기술의 진보가 인구 증가의 압력을 극복할 만큼 크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1000년에서 1300년까지 두 배 내지 세 배 증가했던 유럽의 인구는 1300년에서 1450년 사이의 기근, 역병, 전쟁으로 인해 4-5세기 수준으로 급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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