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문화: 유럽, 지중해, 아시아

서유럽은 비잔티움 제국이나 아랍 세계보다 문화적으로 크게 뒤쳐져 있었습니다. 전쟁과 이동이 계속되면서 1000년경까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기도 했었고, 대부분의 지적 자원이 성경 연구에 투자되었던 탓도 있었죠. 중세 초 유럽의 유일한 교육 및 연구 기관이었던 수도원과 교회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화나 실용적인 지식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대부분 로마 제국의 유산을 지켜왔던 이슬람 세계와 비잔티움으로부터 서유럽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동방과 서방의 교류는 11세기 말부터 수백년동안 지속된 십자군 전쟁에 의해 가속화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동지중해 지역에서 향신료, 비단, 예술품, 설탕, 염료 등을 들여왔고, 서유럽의 올리브유, 꿀, 목재, 금속, 모직물 등을 수출했습니다. 이러한 교역망을 따라 천문학, 의학, 수학, 지리학, 건축 등의 지식이 흘러들어왔습니다.

이러한 지식의 전파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어 원전은 유럽 세계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학자들은 그것을 아랍어로 번역해두고 있었어요. 이슬람 제국이 이베리아 반도를 오랫동안 지배하는 동안 스페인 지역의 유대인 학자들은 아랍어 판본을 라틴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를 계승한 아랍의 선진의술을 유럽에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요충지인 톨레도가 기독교 세계로 넘어오면서 이 지역은 그리스어나 아랍어로 된 선진 지식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장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체스를 포함해 그야말로 온갖 지식이 흡수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요? 성경의 권위에 기대어 진리를 사고해온 유럽인들에게 이성적 추론을 통한 진리에의 접근을 논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매료되어 이성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면서 이성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입증하려 했어요. 이들을 스콜라 철학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종합해 낸 게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합리적으로 규명되어야 하는 자연의 진리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신앙의 진리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이라는 이야기를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정리한 대학자죠. 이 스콜라 철학은 수학적 방법을 통해 자연을 연구하는 자연과학과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는 신의 권능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다시 이어집니다.

스콜라 철학자들의 관심은 중세 초 수도원에서 공부하던 신학자들과 약간 달랐습니다. 이들은 도시 근처에 학교를 세우고 함께 모여 토론을 했고, 이러한 모임은 대학의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1088년 설립된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 1200년경 세워졌다고 추정되는 파리 대학이 가장 초기의 대학들입니다. 대학은 교회와 정치권력과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었고 동방에서 수입된 여러 지식을 저장하고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대학은 아직까지도 지식 생산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죠.

지중해 지역에서 교역과 지식의 교류가 활발해지던 때에 아시아에서는 몽골이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교황청과 유럽의 군주들은 몽골이 아랍의 군주들을 공격해주리라 기대했으며 몽골의 지도자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습니다. 몽골이 중국을 정복하고 실크로드가 활성화되면서 유럽과 몽골을 잇는 상업 교류도 이루어졌습니다. 이 교역에 나섰던 이 중 하나가 마르코 폴로였죠. 하지만 몽고인들이 세운 원나라가 명나라에 의해 무너지면서 유럽과 아시아의 교통로는 닫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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