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1970, 부의 이동은 부동산에서 시작된다

강남 1970, 부의 이동은 부동산에서 시작된다

“어디 사세요?”

대학교 1학년, 일개 주소지가 그리 대단한지 모르고 있던 순진했던 그 시절. 마산에서 갓 올라와 촌티가 무척이나 진동했던 그때. 자기소개의 시간이 다가왔다. 평범하고 지루한 자기소개가 이어지던 그때. 압구정 근처에 산다는 한 친구의 뜬금없는 본인 주소지 소개가 끝나자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직감했다.

순간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압구정이라니. 그러나 다음 자기소개 타임의 주인공 얼굴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도곡동 삽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 갔다 왔습니다”. 도곡동이라니, 타워팰리스가 있는 그 동네가 아닌가. 게다가 미국 유학? 뒤이어 등장한 다음 타임 주인공은 기죽지 않았다.

“평창동 삽니다. 학교는 경복고 나왔습니다.” 젠장, 드라마에서나 보던 동네가 아니던가. “평창동입니다”하고 전화를 받는다는 그 동네. 학교는 또 왜 하필 경복고였나.

더럽게 운이 없던 나는 만인 앞에서 ‘촌동네’ 출신임을 고백해야만 했다. “마산에서 왔습니다.” 피식거리는 웃음소리 끝에 동기생들은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 후로 군 입대 전까지 대학에서 내 별명은 ‘김마산’이었다. 이 이야기는 각색 없는 ‘리얼 스토리’다.


“전 압구정 삽니다.”

우리는 일개 주소지가 각 개인의 계층을 대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압구정 삽니다”, “평창동 삽니다”라는 말에 담겨진 의미는 단순히 스스로가 사는 행정구역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조건, 학력 자본, 게다가 스스로가 향유하는 문화적 수준까지를 은유적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스스로의 계층이 평범하지만은 않음을 ‘자기소개’라는 말을 빌려 전달했을 뿐이다. 이는 어디에 사느냐가 어떻게 사느냐와 직간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짐을 뜻한다. 씁쓸하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집은 내 몸 편히 쉬어 내일 아침에도 일어나 노동할 수 있는 체력을 보충해 주는 역할에서 그치지 않는다. 집을 넘어서 집들이 모여있는 동네는 각자 정체성을 가진다. 계층적 상징성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상징성은 특정 집단이 해당 동네에 모여서 산다는 점 때문에 만들어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통 ‘부자’라고 불리는 부유층은 끼리끼리 모여 살았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뉴욕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사이드, 도쿄의 아카사카, 런던의 첼시까지 잘나가는 나라에는 잘나가는 동네가 있다. 한국도 나름 잘나가는 나라다. 안 좋은 건 다 따라 한다.

서울에만 ‘부촌’하면 떠올려지는 동네는 여럿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쌓여온 이미지를 가진 ‘전통부촌’이 있는가 하면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부촌’도 있다. 해방 이후 서울의 부촌은 한강 북쪽과 남쪽을 오가며 확장해나갔다. ‘강남’이라 불리는 신흥 부촌이 성장해나갔고, 강남의 성공사례를 따라 새롭게 날갯짓 한 동네들도 몇 있었다.

그렇게 서울은 부촌을 ‘만들어’ 갔다.
그렇다. 오늘은 강남과 그 아류의 옛이야기다. 서울의 ‘부’가 한강 이남으로 이동하던 그 때의 이야기 말이다. 그리 오래전도 아니다.


어려운 시기에도 살만한 사람들은 살아간다

해방 서울, 서울 인구는 폭증한다. 허나 고소득층은 티끌, 중산층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도 한 줌이었다. 경제력의 차이는 문화 수준의 차이로 이어졌다. 어려운 시기임에도 있는 집에서는 풍족한 삶을 살았다. “와이샤스는 필그림”, “여성의 몸차림은 외국 최신 카다로그에 의해 직수입된 유행”이라고 할 정도였다.

벨벳 코트를 두르고 콜드크림으로 화장하는 사람, 반면 담요를 잘라 외투를 만드는 사람이 공존하는 도시, 서울이다. 꿀꿀이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 반면에 커피에 과자를 찍어 먹는 사람이 공존하는 도시, 1960년 전반기까지의 서울이다.

이 시기에도 ‘알짜’ 상류층은 끼리끼리 집단을 이루며 살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통적 부촌인 성북동 일대와 종로의 북촌과 용산의 한남동에서 서빙고로 이어지는 공간, 그리고 마포의 성산동 일대가 이들의 주 서식지. 조선 후기 사대부들의 거주지부터 식민지 시기 일본인 상류층들이 머물던 공간이 1960년대 전반기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분포는 서울이 아직 본격적인 개발 성장의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산업화 단계에 접어들면 계층 간 이동이 활발해지고 중산층을 포함한 상류층으로 이동하는 인구 또한 늘어나게 마련이다. 계층 이동에 따른 거주지의 변화 또한 마찬가지다. 아직 서울은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한강을 건넌 사람들

1966년, 서울은 변한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성공 가도에 오르고 제2차 경제개발계획이 준비되던 그 시기, 때에 맞춰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부산시장에서 서울시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서울을 중심으로 사무직 비중이 증가했고 화이트칼라로 대표되는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학력과 ‘안정적 월 소득’이 새로운 계층 형성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문제는 집이었다. 중산층을 담을 공간이 필요했다.

여의도와 이촌동을 중심으로 한 한강변이 선두에 섰다. 거의 같은 무렵 이른바 ‘영동개발’이 시작된다. “강북 지역 인구 분배를 목적으로 한 신시가지 건설”을 목표로 강남이 주거 중심의 부도심으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단순한 집이 아니라, 새로운 계층을 담을 거대한 ‘동네’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2년 2월부터 강북에 더 이상 유흥시설과 백화점, 시장 등이 신·증설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동요한다. ‘지금 가야 하나?’, ‘아니, 아직 때가 아니다.’로 나뉜 여론을 뒤로하고 1975년 4월, 한강 이북 지역 택지 개발이 노골화되자 ‘너도, 나도’ 강남으로 이삿짐을 싸기 시작한다. ‘강남 러시’의 출발이다.

허나 처음부터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을까? 아니다. 부잣집들이 강남으로 움직이게 된 시점은 소위 ‘명문고 강남 이전’ 이후다. 이건 하나의 사건이다. 경기고를 시작으로 휘문고, 숙명여고, 서울고, 중동고, 경기여고까지 70년대 후반 시작된 명문고 이사행렬은 8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이른바 8학군의 탄생이다.

‘새 동네 탄생’의 분기점이 된 이 사건을 기점으로 강남·북의 계층분화 현상은 뚜렷해졌다. 1980년 시점에 사회경제적으로 명확히 최상위 계층과 상위계층이 주로 거주하는 동네는 다름 아닌 강남이었다.

‘강남 러시’의 원인 중 하나는 아파트 생활의 편리함이었다. 주택에 비해 평수도 넓고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력적인 주거 형태로 각광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 즈음이다. 때문에 전문직과 관리직, 사무직 종사자들이 안정적으로 강남 아파트에 안착하기 시작했다. 아파트는 새 계층을 담을 새 그릇임과 동시에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강남은 그야말로 새롭게 성장한 부유층, 다시 말해 중산층들이었다. 1970년대 후반 서울의 중산층들은 강남에 터를 닦아 부동산을 기반으로 삶의 형태를 바꿔나가기 시작한다. ‘강남 부자’의 시작이다.


강남 사는 사람들만이 누렸던 특권

새 그릇에 담긴 새 계층은 만족을 몰랐다. 서울에 집 한 채 가진 ‘중산층’이란 호칭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원래 한번 만들어진 욕망은 끝이 없고, 사다리 끝을 향해 경주마처럼 달려간다. 그게 세상 이치다.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강남에 담긴 욕망은 상류층의 삶을 욕망하기에 이른다.

1980년대 이미 부동산 자산만으로도 부잣집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부동산 가격은 강남 아파트 중심으로 폭등했다. 안정적인 월급을 기반으로 성장한 서울의 중산층 중 강남으로 이전한 이들은 상류층으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부동산으로 마련했다. 강남의 ‘돈잔치’가 시작된 것도 땅값이 뛰면서부터다.

이른바 ‘강남문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1980년대 초반의 언론에 소개된 ‘강남문화’란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문화센터나 미술관(화랑), 예술극장 등에서 만나 취미생활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주로 주부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던 문화도 여기게 속한다.

같은 시간 남성들은 점심 한 끼에 1만 원을 훌쩍 넘는 호텔 식당에서 모임을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갔다. 강남지역의 ‘고유한 문화(결국은 모방이지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강남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공동체 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에야 별거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미술관을 가거나, 호텔에서 밥을 먹는 행위는 1980년대 서울시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문화는 아니었다. 그 자체로 ‘강남문화’는 특별했다. 이후 강남 곳곳에 화랑과 음악 감상실, 상설극장, 시 낭송을 위한 작은 카페, 미술관 등의 순수 예술 분야의 “고급스런 공간”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부동산을 기반으로 성장한 “신흥부유층”들이 전통적인 상류층의 문화를 흡수하고 사회적으로 부유층으로서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욕망의 완성은 교육이었다. ‘강남 8학군’이 위치한 만큼 유별난 교육열도 강남의 특징이다. 강남이 교육열에 민감했던 것은 명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했다는 사실 하나로만 만들어지지 않았다. 강남의 ‘신흥부유층’들은 스스로의 계층 상승이 학력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빠르게 습득했다. 학력 간 소득격차는 8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더 강고해졌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자식 교육은 자신들이 성취한 ‘중산층’, 혹은 ‘상류층’이라는 계층을 아래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였다. 이미 80년대 중반 ‘강남교육특구’로 지칭될 정도로 강남 사람들의 교육열은 강남을 상징하는 키워드였다.

고등교육을 이수한 사무직 혹은 전문직 출신으로 70년대 초반 강남으로 이사하여 부동산을 통해 중산층을 넘어 상류층으로 진입한 사람, 그리고 그들의 자녀. 이렇게 강남 1세대와 1.5세대가 완성되었다.


Post 강남은 바로 OO!

1980년대 중반으로 넘어 3저 호황으로 인해 경제는 꾸준히 성장했고, 넥타이를 맨 화이트칼라는 서울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었다. 허나 이들 모두 강남에 살 수는 없었다. 이미 강남은 ‘노른자위’를 넘어 ‘황금 땅’이었다.

이들을 어디에 담아야 하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에게 숙제가 생겼다. 강남을 통해 습득한 지식은 복습으로 이어졌다. 집을 ‘소유’해야 한다는 당위는 박정희 정권의 홍보 속에서 ‘돈 좀 벌었다’는 사람들 가슴속에 욕망으로 꽃 피게 했다. 신군부에겐 ‘포스트(post) 강남’이 절실히 필요했다.

포스트 강남의 1순위로 선택된 곳은 목동이었다. 결과는 같았다. 사업지 선정과 동시에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다. 입주권은 웃돈만 20평형대 1천만 원, 30평형대는 1천5백만 원을 상회했고, 50평형대는 2천만 원을 넘어섰다. 평당 시세는 1백50만 원을 호가했다.

목동으로 부족했던 개발은 상계지구 개발로 이어졌다. 상계지구는 기본방향은 확실했다. 입주자들은 무주택 중산층일 확률이 높았다. 공급될 주택 규모 또한 20평 이상이 약 60%를 차지했으며 예상 구매자들의 학력 분포는 목동보다도 더 높았다. 시공을 담당한 주택공사는 상계동에 거주하는 전문기술직과 행정관리직 등 화이트칼라의 비율을 50% 이상으로 바라봤다.

신군부의 ‘Post 강남 Project’는 성공적이었을까? 복잡한 이야기다. 판단은 주민들이 알아서 하시길 바란다.


부자들이 사는 아파트들

1990년을 기준으로 전문직과 관리직으로 분류되는 상층의 거주 비율은 강남구가 30.1%, 서초구가 29.7%로 압도적이다. 뒤이어 상계동이 포함된 노원구가 16.3%로 선전했지만 강남의 명성을 뒤쫓기는 버거웠다.

이와 같은 추세는 더욱 심화되어 5년 뒤 조사에서는 상층의 비율은 강남구가 55.1%까지 치솟았다. 노원구 또한 33.4%까지 올라 강남과 서초에서 분리된 송파구와 동작구 다음으로 높았지만, 여전히 20%가 넘는 차이였다.

흥미롭게도 ‘서울 부의 지도’가 재편되는 시기에도 ‘재벌’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전통의 부촌에 자리를 잡았다. 1990년 손꼽히는 부촌으로 성북동과 평창동과 청담동이 나란히 꼽혔지만, 이들은 쉽게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아마도 이는 전통 부촌의 두 번째 특징 때문인 것을 보인다. 북악산 자락과 남산 자락의 부촌은 단순히 ‘돈’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한 차원 높은 벽을 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뒤집어지기 시작한 건 2000년대다.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부터 상황은 조금씩 바뀐다. 한남동 한남 더 힐, 성동구 갤러리아 포레, 삼성동 아이파크, 대치동 타워팰리스. 2002년 도곡동 타워팰리스를 시작으로 아파트 브랜드 또한 부촌을 상징하는 하나의 ‘심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정 ‘동네’에서 특정 ‘아파트 촌’으로 변화한 것이다.

재벌도 움직였다. 재벌 2세를 넘어 3세들은 전통적인 부촌을 떠나 새롭게 떠오르는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나 최고급 아파트 단지로 주거지를 옮긴다. 재밌게도 재벌이나 정계 인사들이 특정 아파트에 입주하면, 그 자체가 브랜드 홍보로 이어진다. ‘재벌이 사는 아파트’, ‘정치인 아무개가 사는 아파트’ 등으로 입소문이 나면 해당 아파트의 가격은 동반 상승한다.

끼리끼리 더 좁은 울타리에 모여 살려 발버둥 친다. 이런 특징들은 점점 더 노골화되고 있다. 마치 하나의 성(城)처럼 강고하게 벽을 친다. 더 나아가 다른 동네에 사는 서울시민과 스스로를 구별한다. 어쩌면 신분제가 존재하던 전근대의 사회보다 더 높은 벽이 2021년 현재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끼리끼리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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