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삼성과 CJ는 대체 왜 싸우는 거야?

삼성과 CJ는 대체 왜 싸우는거야?
진짜 ‘재벌 집’ 순양, 아니 삼성이 걸어간 길진양철, 아니 이병철의 시작화제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화제 속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오랜만에 2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보인 드라마였기에 배우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화제였던 드라마였는데요. 무엇보다 진양철 역을 맡은 이성민 배우의 연기력이 새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믿고 쓰는 배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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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문제는 다음에 벌어진다. 경영일선에서 1보 후퇴해 2년간 회장직에서 물러나 있던 이병철이 1968년 경영 일선으로 복귀하려던 그때였다. 사카린 밀수사건의 책임을 지고 옥살이를 했던 이창희가 아버지 이병철에게 ‘똥물’을 뿌린 것이다(오해하지 말자, 진짜 똥물은 아니었다). “정부와 갈등을 빚었던 전임 회장의 복귀가 그룹의 미래에 이롭지 않다”며 삼성그룹 내에서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자, “아버지가 부정한 일을 저질렀으니 기업에서 영원히 손을 떼게 해야 한다”는 탄원서까지 작성해 박정희 대통령 편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그 탄원서에는 “아버지가 해외로 100만 달러를 밀반출했으며, 현충사를 지을 때 경비를 부풀려 탈세를 저질렀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탄원서를 본 박정희 대통령이 이창희의 행태를 “천륜을 어기는 행동”으로 간주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사실관계는 알기 어려우나 결과적으로 탄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탄원서의 내용을 전해들은 이병철은 아들이 획책한 쿠테타를 진압하고 이창희를 삼성그룹 내 후계 구도에서 축출하게 된다.

사카린 밀수사건에 이어 차남 이창희의 쿠데타까지 삼성은 계속된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 사건의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번지게 된다. 불똥이 향한 곳은 장남 이맹희였다. 이맹희가 이창희의 탄원서 투서 작성 과정에서 공모했다는 논란이 제기된 것이다. 둘째 아들에게 배신당한 이병철의 의심은 장남에게로 옮겨붙었다. 뒤통수를 맞은 이병철은 이맹희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아들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하지만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었던 이맹희는 아버지의 의심 속에서도 경영에서 완전히 내쳐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아버지 마음속에서 자라난 ‘단 한번’의 의심이 이맹희의 행동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되었고, 아버지와 아들의 사소한 갈등이 이어졌다. 그렇게 천천히, 삼성에 이맹희가 있을 자리는 사라진다. 그렇게 셋째아들이었던 이건희에게 기회가 왔고, 결국 이건희가 차기 회장으로 낙점된다.

사카린 밀수사건의 나비효과는 엄청났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에게 이맹희의 ‘몰락’은 경영 능력 부족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였다. 이는 “이맹희에게 경영을 맡겼더니 6개월도 채 못가서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는 이병철의 회고를 통해 확인된다. 하지만 장남 이맹희의 기대는 달랐다. “아버지와의 사이에 상당한 틈새가 있었지만 언젠가는 나에게 대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었다”던 것이다. 아버지는 기업인으로 아들을 평가했고, 아들은 그저 부자 사이의 감정적인 갈등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이유가 뭐든 간에, 이후 이맹희는 삼성이라는 거대해진 기업 안에서 자리를 잃고 경영에 완전히 손을 놓은 채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뒤 이맹희의 아들, 그러니까 이병철의 장손 이재현이 삼성 경영 일선에 등장한다. 본격적인 CJ 분가의 신호탄이었다.

장손의 독립, CJ의 탄생

이맹희의 장남이자 이병철의 장손 이재현은 1983년 모 외국계 은행에 입사해 평범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마도 아버지였던 이맹희가 할아버지와 멀어진 상태였기에 자신에게까지 상속의 기회가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테다. 하지만 이병철의 생각은 달랐다. 그룹의 장손이 남의 회사에서 일하는 꼴을 볼 수 없다며 1985년 9월에 이재현을 제일제당에 입사시킨다. 바로 이때 삼성그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제일제당이 장남 이맹희 몫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뒤인 1987년에 이병철 죽자 삼성은 이건희를 중심으로 한 ‘2세대 경영’이 본격화된다. 이후 이재현을 중심으로 새롭게 경영을 시작한 제일제당은 천천히 삼성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게 된다. 1993년, 결국 제일제당은 정식으로 계열 분리를 선언하고 삼성과 결별해 새살림을 차리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후로도 삼성의 ‘적통’을 향한 싸움은 이어졌다. CJ 사옥에 마련된 이병철 회장의 홀로그램 흉상과 유품을 영상 전시하는 추모공간은 “우리가 진짜 삼성의 적통”이라는 CJ의 의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심지어 이맹희 회장은 1994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대 회장(이병철)이 이건희 회장에게 그룹 대권을 넘기면서 차기엔 재현이(장손)에게 물려주라고 유언했다”며 본격적인 ‘적통’ 경쟁에 시동을 걸었다.

이에 대한 이건희의 반응은 맹렬했다. 이맹희의 주장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30년 전에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하고, 청와대 그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한테 고발했다가 가문에서 이미 퇴출당한 양반이라며, 자기 입으로는 장손이다, 장남이다 그러지만 이미 아버지께서 맹희는 완전히 내 자식 아니다라고 못 박았으며, 지금도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한편,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감정싸움 한 가운데서 CJ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한 이재현은 삼성으로부터 회사를 독립시킨 후 초기부터 공격적인 사업다각화를 시도한다. 1996년 5월 1일부로 그룹 출범과 동시에 지금의 CJ 로고의 초기형태를 만들어 기업 이미지를 새롭게 했고, 식품산업을 기반으로 바이오와 생명공학 분야까지 사업분야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엔터테인먼트로의 진출을 본격화하는데, 제일제당 산하에 영화사업본부를 설치하고 1996년부터는 직접 영화를 제작하는 데에까지 진출한다.

특히 엔터테인먼트 과업을 주도한 인물은 이미경, 그러니까 이재현의 친누나이자 이병철의 장손녀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확장을 거듭해 CJ는 현재 한국 영화산업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존재로 성장했다. CJ 계열의 회사 중 하나인 CGV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이후 1997년 케이블 방송사 뮤직네트워크를 인수해 방송사업에까지 손을 뻗은 CJ는 현재 연예 전반을 주무르는 ‘엔터공룡기업’으로 성장했다. 거기에 2012년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부터 대한통운을 인수하면서 ‘CJ대한통운’을 설립하고 물류사업을 아시아 전반으로 확장하게 된다. 그렇게 현재 CJ는 국내 독보적인 1위 식품회사이자. 엔터테인먼트, 물류 등의 사업에서 최상위권의 시장 지위를 유지하는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그래서 아빠‘들’도 돌아가셨는데, 삼성과 CJ는 화해할까?

두 기업 간의 화해에 관한 이야기는 꾸준히 들려오고 있다. 2014년 이재현 회장이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되자 이건희의 장남 이재용을 중심으로 한 삼성가는 이재현 회장에 대해 탄원서를 제출했다. 게다가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사망했고, 양 기업은 모두 3세 경영체제로 굴러가고 있다. 사이가 나쁠 이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2015년 8월 이맹희가 죽었을 때 조카 이재용이 직접 문상해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으며, 이재현도 작은 아버지 이건희 회장의 빈소에 조문을 하며 애도를 표시했다.

사실 둘 사이가 좋아진다고 우리에게 콩고물이 떨어질 일은 없다. 그래도 흥미롭지 않은가. 거대한 공룡기업 둘 사이 인연이 말이다. 원수였던 과거를 정리하고, 형제기업으로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앞으로의 삼성과 CJ의 관계가 궁금해진다. 혹시 모르니 주식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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