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실력’ 하나로 뒤엎어버린 임진년의 전쟁

이순신이 ‘실력’ 하나로 뒤엎어버린 임진년의 전쟁

당신은 이순신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장우성 화백의 1953년작 조복좌상 영정

임진년에 일어난 조일 간의 전쟁(임진왜란)은 조선의 역사, 아니 동아시아 전체의 판도를 뒤흔든 전쟁이었다. 그런 세계사적 변화의 한 가운데 선 인물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그런 이순신의 위상에 걸맞게 각종 전기며, 논문은 수백여 편에 이른다. 대중매체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와 영화가 수십 편에 달하는 실정이다.

더불어 이순신을 다루는 글과 콘텐츠는 대부분은 그를 우상화하거나 신격화하는 종류의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이유로 대한민국에서 이순신을 모르는 사람은 영유아(?)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으며, 그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성웅’, 혹은 ‘영웅’이다. 행여나 이순신에 대한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가는 ‘매국노’ 취급을 당하기 쉽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사실은 실제로 이순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거다. 대부분 한국 사람은 한산도대첩이나 명량해전과 같은 ‘일본과의 해전에서 싸워 이긴 사람’ 정도, 역사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원균과의 관계나 백의종군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일 거다.

사실 이건 이순신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한국에서 ‘역사란’ 모름지기 딱 그 정도의 단편 지식을 기억하면 되는 것으로 ‘박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상을 알거나, 그 이면의 사고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교육받은 적이 없을 거다.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아니 인간 이순신이 아니라 한국인이 그토록 추앙하는 ‘이순신 장군’의 진면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임진전쟁 전후의 상황, 그리고 그 안에서 이순신의 위치 등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전쟁터에서의 이순신의 진정한 활약상과 그 덕분에 덧붙여진 사후의 추훈 과정이 이해될 수 있다.

조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태정대신 재직 당시의 초상화

일본의 전국시대를 어느 정도(?) 마무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곧 희한한 망상에 휩싸인다. 바로 명나라 정벌이다. 심지어 그는 명나라를 넘어 인도까지 정벌하겠다는 이해하기 힘든 망상증에 사로잡혀 버린다. 물론 그 ‘망상’에는 일본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외부로 돌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히데요시 개인의 정복욕은 무시하지 못한 전쟁의 이유가 된다.

아무튼, 히데요시의 망상 안에서 조선은 그저 길잡이, 혹은 명나라로 가는 길목 정도로 인식되어 있었다. 히데요시는 곧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사신의 방문에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조선에서는 결국 논의 끝에 1590년 3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 김성일 등의 통신사를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통신사 일행의 일본행은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히데요시를 만나지 못했던 것은 물론 5개월 만에 국서를 전달하게 되었는데, 히데요시와의 만남에서부터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게 되었던 거다. 히데요시는 통신사와의 만남 자리에 자신의 갓난쟁이 아들을 안고 들어왔고, 급기야 그 갓난아이가 통신사들이 보는 앞에서 소변을 보는 일까지 벌어진다. 히데요시 특유의 고도의 정치술이었다. 조선을 무시하는 한편으로 ‘너희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길이나 터줘’와 같은 표현을 돌려 했던 거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1591년 봄에 조선으로 돌아와 선조 앞에서 보고한다. 그런데 여기서 황윤길과 김성일의 정세 판단 보고가 일치하지 않는다.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며 풍신수길의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 하였습니다." 황윤길(黃允吉. 정사 正使, 서인)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풍신수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김성일(金誠一. 부사 副使, 동인)

둘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본이 쳐들어올 수 있으니, 다급히 준비해야 한다는 황윤길과 그렇게 급하지 전쟁을 준비하다가는 민심이 동요되니 천천히 준비해도 된다는 김성일의 의견이 갈린 거다. 김성일도 ‘왜적’이 올 것이라 의심은 했지만, 그로 인해 정국이 요동치면 외려 제대로 된 준비가 힘들다고 생각했던 거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전쟁에 대한 기운을 느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기는 1592년 1월 기록이 시작되는데, 심상치 않았던 국제 정세를 비롯해 일본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시각은 이순신‘만’의 탁월한 시각이 아니라 당대 조선의 관료라면 누구나 인식하고 있던 상식이었다. 『조선왕조실록』만 보더라고 당대의 정세를 인식하고 있으며, 전쟁 분위기를 우려하던 신료들이 많음을 확인할 수 있다. 통신사를 굳이 파견한 것도 그러한 분위기에 따른 조치였다.

“왜인들이 명나라를 침범하고자 한다는 말이 유구국까지 번져 있고 조선도 이미 일본에 굴복하여 삼백 명이 투항해 가서 길을 인도하기 위한 배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선조실록> 1591년 10월 24일

위의 사료에서 말해주는 것처럼 전쟁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 선조는 이미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준비를 조금씩 서두르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조선은 이미 을묘왜변(1555년)이 벌어진 이후 일본이 언제든지 침략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꽤 탄탄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조선이 생각했던 일본군의 규모와 그들이 갖춘 실제 전투에 대한 경험 등에 무지했고, 2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전란이 크게 없었던 것도 문제가 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부족’이었다. 1467년 오닌의 난 이후 거의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의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던 거다. 조선이 얻을 수 있는 정보라고는 ‘왜관에 들어온 일본인’이나 부산에서 가까웠던 ‘대마도’를 통해 들려오는 소문 정도였다.

사실 역사적인 사례로만 살펴보더라도 조선의 판단은 그리 ‘바보’ 같은 판단은 아니었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여러 나라와 주로 전쟁을 했던 나라는 거란과 여진과 같은 북방의 나라이거나, 아주 오래전 고구려와 맞붙었던 수나라와 당나라 정도였다. 그중에 임진전쟁과 같이 20만이 넘는 대군이 쳐들어왔던 전쟁은 수-당과 고구려 간의 전쟁, 그리고 요나라와 고려와의 전쟁 정도가 전부였다. 조선이 일본을 얕본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조선의 진짜 문제는 전략이었다. 전쟁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군의 배치부터,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대책이 부족했다. 심지어 군대를 대부분 곡창지대였던 전라도에 배치했고, 서해안에서부터 한양으로 올라오는 루트를 집중적으로 방어력을 증강시켰던 거다. 이러한 조선의 판단은 전쟁 초 경상도 지역의 지상군이 빠르게 무너지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렇게 최대 18만 명의 조선 정규군은 20만여 명의 일본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지옥’ 같은 전쟁의 시작

임진년, 그러니까 1592년 4월 13일에 임진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본 측의 선봉장은 그 유명한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18,700명을 군대를 총 700여 척에 나눠 태워 부산으로 들어온다. 당시 부산진 첨사 정발은 부산 첨사 정발은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본군의 전함들을 발견하고 조공하러 오는 배로 착각하게 된다. 그렇게 방비의 시간을 날려버리게 되었지만, 이후 차근히 백성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600명도 되지 않던 병력을 동원해 마지막까지 싸우다 전사한다.

이후 서평포, 동래성 등이 넘어갔지만 조선에서도 군사들을 소집해 육전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군은 생각보다 많았다. 게다가 당시 일본군은 전투 경험이 조선의 군인에 비해 수십 배 많은 정예군이었다. 곧 울산과 경상좌도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무너졌다. 그렇게 4월 18일 선봉장이었던 고니시와 그의 군대가 양산에 입성한다.

이후 4월 18일에는 고니시의 강력한 일본 내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천여 병력이 부산에 도착했고,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 1만 1천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겁에 질린 경상도 지역의 장수와 병사들은 일본군이 승전 소식을 듣기만 해도 도망가기 바빴다.

전쟁이 발발했지만, 조선은 여전히 일본을 제대로 몰랐다. 초반 열세는 잠시일 뿐 간단히 사태가 수습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일 장군의 군대가 상주에서 고니시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이후 당대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특히 신립이 이끌었던 경군 1만여 명의 대패는 충격이었다. 바로 이 시기, 선조는 한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떠난다.

하지만 이 판단은 선조에 대한 기존의 오해들, 그러니까 ‘나라를 버리고 떠나버린 군주’라고 비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단 수도를 지키는 경군 자체가 탄금대에서 대패하면서 한양을 지킬 수 있는 군대는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한양은 전쟁에 대비해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성이 아니었다. 성곽 자체가 거의 없고, 넓었다.

여기에 하나 더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전근대 시기, 그러니까 왕조 국가에서는 왕이 적에게 잡히면 그걸로 전쟁은 끝난다. 지금도 군 통수권자의 생존 여부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사안이지만, 이 시기는 왕이 죽거나 잡히면 그걸로 전쟁은 패배다. 선조의 판단은 나름대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존립시키기 위한 처사였던 거다.

그렇게 개전 20일 만인 5월 3일 일본군, 정확히는 고니시의 군대에 한양이 함락되는 치욕을 겪게 된다. 일본군은 빠르게 한양을 점령했지만, 다행히도 선조는 급히 한양을 떠났고 왕을 잡아 전쟁을 끝낸다는 1차 목표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지만 이후 고니시의 군대는 평양성까지 점령했고, 가토의 군대는 함경도까지 올라갔다. 이 와중에 두 왕자(임해군, 순해군)까지 사로잡았다. 선조는 그 시각 영변을 지나 의주까지 피난길에 오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빠르게 한양으로 ‘직공’했던 일본군 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다. 경상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관군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고, 더불어 ‘의병’이라는 일본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한 거다.

이들은 초기 쉽게 무너지던 조선군과는 달랐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시점(2달 가까운)에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전투에 대한 세심한 준비를 마쳤던 거다. 일본군의 피해는 점점 누적되고 있었다. 게다가 겨울이 찾아오면서 일본군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거기에 하나 더, 바로 이순신의 등장이었다.

당시 일본군의 전략은 ‘육군의 진격’, 그리고 수군의 남해, 서해 해상로 장악이었다. 남해와 서해를 통해 일본군 보급로 확보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바로 그 전략이 보기 좋게 실패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이순신 장군 덕분이었다.

생각보다 강했던 조선의 수군

이순신 장군의 대단함에 앞서 주목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수준이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조선이 임진년 이전 왜구와 겪었던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파악한 일본 수군의 배에 맞서기 위해 만든 혁신적인 전함이었다. 조선 수군은 다년간 겪은 왜군의 전투방식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왜구의 전함을 압도하는 크고 튼튼한 새로운 전함을 개발했던 거다. 더불어 당시 조선에서 발전되어 있던 함포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했고, 이러한 기술이 종합된 배가 바로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일본의 전함보다 높은 위치에서 적을 조망하고 사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갑판의 수군과 포수의 활동 공간을 층에 따라 배치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덕분에 전투 효율이 크게 상승했다. 판옥선은 적의 함선을 몸체로 들이받는 등의 다양한 전술에 활용될 수 있었다. 조선의 수군이 초기부터 일본의 수군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이순신의 지도력도 중요했지만, 판옥선이라는 압도적 전함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 또 하나, 조선 수군의 비밀 병기는 거북선이었다. 일본 수군의 주요 작전인 근접전을 사전에 방비하기 위해 옻칠한 나무 지붕에 쇠못을 빼꼭하게 박은 배를 개발했던 거다. 거북선은 애초에 일본군의 상륙 자체가 불가능하였고, 근접을 허용하지 않도로 화력을 높여 적함을 격침했기 때문에 거북선은 그야말로 ‘해상의 요새’였다.

거북선, 그러니까 한자로는 ‘귀선(龜船)’이라 불리던 이 배는 태종대 이미 제작됐다. 물론 태종대에 제작된 귀선과 임진년에 이순신이 만들어 낸 거북선은 수준의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거북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무적의 전함’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거북선에 대한 인식은 이순신의 활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잘못된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소수만이 제작되어 활용되었고, 선체 역시 기본적으로 판옥선을 축으로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압도적인 전함’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중요한 건 이 거북선을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제대로 전투에서 사용했는지가 될 테다. 실제로 거북선은 이순신 함대의 초기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된다. 전장에서 ‘돌격선’의 역할을 하기 위해 판옥선보다 훨씬 튼튼한 구조로 제작되었고, 용머리 부분에 함포와 유황 등의 가스를 내보낼 수 있는 장치를 장착해 적을 압도했다. 일본 측의 기록에서도 거북선의 활약과 공포에 대한 내용이 자주 발견될 정도로 거북선의 활약은 대단했다. 거북선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거북선을 제대로 활용한 이순신이라는 장수가 대단하다는 뜻이다.

이순신은 전쟁이 발발하고 이틀 뒤인 4월 15일, 일본군의 대규모 부산 상륙에 대한 정보를 보고 받았다. 이후 부산과 동래 지역의 전황을 계속해서 보고받는다. 그리고 5월 4일, 한양이 함락되고 이틀 뒤 이순신 함대는 처음으로 전투에 출전하게 된다. 5월7일 벌어진 옥포해전이었다.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일본 함대 30여 척을 격파한 대승이었다. 조선이 임진왜란 동안 거뒀던 ‘유의미한’ 첫 승리였다. 이후 합포해전과 적진포해전을 통해 왜군을 격파하면서 이순신 함대는 연전연승을 거두고 제해권을 지켜내게 된다. 이순신 신화의 시작이었다.

전장이 기울어질 때마다 다시 살려낸 명장 이순신

한산도 대첩 기록화

이후로도 바다에서 이순신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이른바 ‘한산도대첩’까지 완벽히 승리한 이순신은 사실상 일본 수군을 궤멸시키고 재해권을 장악한다. 이후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조선 사상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된다.

이 와중에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고, 초반 조선의 열세였던 임진년의 이 전쟁은 곧 교착상태에 빠진다. 그 뒤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회담이 진행되었고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순신은 이 시기에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군사훈련과 군비확충 등에 매진한다. 그러나 1597년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은 다시 침입하게 되는데, 그 전쟁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바로 이때 일본군 첩자로부터 침공 계획이 조선으로 흘러들어왔고, 일본군의 본진이었던 부산을 수군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이순신이 거부하자 논란이 벌어진다. 이순신에게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 걸게 유도한 것이었다. 흔히 일본군의 ‘반간계’로 알려진 이 작전은 사실 원균이 원흉(?)이었다. 사실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작전이었던 부산진 공격을 따를 수 없었던 이순신과는 반대로 원균은 ‘수군의 단독 작전이 가능’하다고 강하게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으로 몰리자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 명령했고, 죽음‘만’은 면한 채 ‘삭탈관직’ 당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 그 유명한 백의종군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이순신이 사라진 조선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바로 이순신 없이 벌어진, ‘칠천량 해전’ 때문이었다. 이순신을 대신해 수군의 총책임자가 된 사람은 원균이었다. 불가능한 미션임을 알고 있던 부산진 공격을 차일피일 미루던 원균은 결국 자기꾀에 자기가 빠져 부산을 총공격했고, 끝내 조선 수군 대부분이 궤멸되는 최악의 전투, ‘칠천량 해전’을 패전을 이끈다.

거의 전멸이었다. 거북선 등의 조선 전함의 대다수가 침몰된 거다. 원균은 육지로 도망가다 일본군의 칼을 맞고 전사한다. 그렇게 한산도 본진이 함락되자 일본군이 조선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직전의 상황에 이르렀던 거다. 그제서야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이때 사실 선조는 수군을 해체하고 이순신에게 육군에 합류하도록 지시했지만, 이때 이순신의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는 장계를 올리며 상황을 역전시킨다. 명량대첩의 시작이었다.

수군이 거의 전멸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조류를 활용해 명량해전을 기적처럼 승리로 이끈다. 130여 척의 대함대와 이순신의 13척의 함대가 맞붙게 된 거다. 이때 조선 수군의 승리는 여전히 학술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승리다.

명량해전 이후 전선은 교착상태가 된다.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한 거다. 그렇게 일본군은 전라, 경상도 남부로 물러나 울산, 사천, 순천 등 남해안 800리에 성을 쌓고 주둔하며 장기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러던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고 일본군은 철수를 서두렀다.

하지만 이 철수를 바라만 볼 이순신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곧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했고,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선두에서 적군을 지휘하던 이순신은 결국이 전투에서 적의 유탄에 맞고 전사한다. 사실상 임진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를 이순신이 마무리하고 죽게 된 거다. 죽음마저 ‘영웅적’인 모습이었다.

이순신은 그야말로 영웅이었다. 그에 대한 ‘추숭사업’은 비록 선조 연간에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정조 때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에 대한 수 많은 전설과 이야기는 바로 이때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후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이순신에 대한 영웅화 작업이 빛을 발했다. 일본을 이겨낸 ‘영웅’이 필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2022년 대한민국이 이순신을 기억하는 방법은 어때야 할까? 정조가 그랬던 것처럼 ‘왕’과 ‘나라’를 위한 충절의 아이콘으로서 기억해야 옳은 방법일까? 아니면 식민지 시기 조선의 백성들처럼 일본을 이긴 ‘전쟁 영웅’으로서의 이순신을 기억하면 될까? 그것도 아니라면 흔히 이야기하는 ‘리더십’의 표본으로서의 이순신일까?

이런 고민이 바로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이순신이라는 ‘영웅’의 행적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순신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두고, 그가 살았던 시대적 맥락과 조건, 그리고 지금 우리의 시각을 종합해 보자는 뜻이다. 그것이 ‘영웅’ 이순신을 더욱 가치 있게 기억하고, 기리는 방법이 아닐까?

대화에 참여하세요
1 이달에 읽은
무료 콘텐츠의 수

조금 더 '깊이 읽는' 지식채널 언리드북. 에스프레소 한 잔 가격으로 매달 20편 이상의 인문∙교양 콘텐츠를 만나보세요.

구독하시면 갯수 제한 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