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의 리듬에 맞춰: 19세기 산업노동자의 삶

오랫동안 인간의 노동은 자연의 리듬이나 노동자 개인의 리듬에 맞추어 진행되었습니다. 해가 뜨거나 지고, 농한기와 농번기가 지나고, 선대제 상인들에게 받아온 재료로 시간이 날 때 물건을 만드는 식이었죠. 하지만 기계와 공장이 들어서고 나서는 표준화된 작업시간과 작업과정에 맞춰 수많은 노동자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일해야 했습니다. 전세계의 면공업 공장으로 흘러들어온 수백만명의 노동자들이 ‘기계의 리듬’에 맞춰 일하게 되었던 것이죠. 기계와 공장은 대서양 건너편에서 일하던 면화농장 노예들의 삶에조차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방적과 방직 공장의 기계 바로 옆에서 일해야 했던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을테죠.

기업가들의 입장에서는 빌린 돈으로 비싸게 구입한 기계를 최대한 활용해야 돈을 제때 갚고 이윤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노동력은 기계가 원활하게 굴러가게 하는 윤활유 정도로 비추어졌어요. 공장 옆에 기숙사를 지어 노동자들의 기상과 취침 시간을 통제하고 일주일에 6일 이상, 적어도 하루 12시간씩 일하게 했죠. 독일의 면산업에서는 주 6일, 14-16시간 노동이 일종의 규범일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기계의 리듬에 노동자들을 맞추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았고 여러 방식의 ‘훈육’이 요구되었습니다. 훈육의 전문가들이었던 군대나 노예농장의 관리자들은 공장에서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죠. 훈육이 되지 않는 노동자는 쉽게 해고하거나 벌금을 물릴 수도 있었어요. “흉측한 얼굴로 동료들에게 겁을 주었다”는 이유로 쫓겨난 노동자들도 있었죠.

노동자들은 공장을 ‘악마의 작업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왜 공장에서 일하려 했을까요? 그건 공장에 고용되어 임금을 받지 않는 이상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농촌에서는 지주들이 토지소유를 늘리면서 농민들의 접근을 막았고 땅을 잃은 농민들은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옛날이었으면 산이나 숲 등 공유지로 들어가 나무껍질이라도 끓여 먹었을텐데, 이제는 근대국가라는 것이 생겨 공유지를 소유했고 이에 대한 접근을 금지했죠. 땔감을 구하려 해도 돈이 필요한 세상이 왔던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필요했어도 공장은 오래 머물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19세기 초 잉글랜드의 한 공장은 20년 동안 700여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는데, 그중 119명이 도망가고 96명이 합법적으로 일을 그만두었죠. 65명은 일하던 와중에 사망했습니다. 한번 공장에 취직하면 기업가들이 원할 때까지 쉽게 일을 그만두지도 못했습니다. 기업가들은 불황기에는 쉽게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싶어 했지만, 호황기에는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확보하고 싶어 했습니다. 국가는 기업가들을 위해 노동계약을 보호하고 고아나 범죄자들을 산업노동력으로 제공하는 제도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계약을 위반한 노동자들은 징역이나 벌금 등 형사법상 처벌을 받았죠.

다른 생계수단이 있는 사람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농사수입에 계속해서 줄었고 적어도 가구원 중 몇 명은 공장에 나가야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여유 인력인 아동과 미혼 여성이 공장에 나가는 경우가 많았죠. 1833년 영국 랭커셔의 면직물 공장에 채용된 전체 노동자의 36% 이상이 16세 이하의 아동이었습니다. 고아원 출신의 아동은 거의 모두 공장에 나가 일했죠. 스페인 카탈루냐의 면직물 산업에서는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70%에 달했습니다. 기업가들은 임금이 남성 노동자보다 훨씬 낮고 가부장적 통제가 가능한 여성 및 아동 노동자들을 선호했습니다. ‘정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해고된 <레미제라블>의 팡틴도 그중 하나였죠.

공장에서의 노동은 노동자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방적공과 방직공 중 군복무가 가능할만큼 건강한 사람은 15%내외에 불과했어요.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자들의 반란은 필연적이었습니다. 기계를 부시거나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이 빠르게 늘었죠. 기업가들은 이번에도 국가의 힘을 빌려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각국 의회에 노동조합, 파업, 집회, 친 노동 정당 등 모든 노동운동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안들을 통과시키게 하면서였죠. 프랑스에서는 ‘기계파괴자’들을 사형에 처하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어요.

이 당시 국가가 ‘자유방임주의’나 ‘야경국가론’을 추구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처지에 무관심했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설명입니다. 중세적 구속에서 벗어난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임금계약을 맺었다는 것도 어폐가 있죠. 국가는 시장에 개입할지 말지를 선택하는 제3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노동시장을 조성하는 주체였습니다. 돈이 돈을 낳아야 하는 자본주의의 이념에 맞게 말이죠.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기계와 자본주의의 리듬에 맞추기 위해 국가의 힘을 빌렸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에게 기회가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가면 산업노동자의 비율이 점점 늘어났고 노동계의 발언권이 강해졌어요. 이들이 부양하는 가족 구성원의 수는 유럽인구의 60%에 해당하는 3억명에 이르렀죠. 게다가 투표권이 점차 확대되면서 노동자들의 정치적 참여도 증진되었습니다. 결국 산업자본주의가 야기한 문제들이 ‘국가적 의제’로 상승했고 이와 관련된 사회개혁이 진행되었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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