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명의 요람, 그리스 문명의 발전과 몰락

‘그리스’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서구 문명의 요람, 인류의 토대, 합리적인 이성과 찬란한 예술 같은 이미지가 아른거립니다. 하지만 빛나는 문명을 건설했던 그리스가 처음부터 대단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리엔트와 이집트 문명이 지중해 세계를 주도하던 때가 있었고 동 지중해의 작은 지역에 불과하던 그리스는 선진문명에서 문물을 수입하며 발전했습니다. 히타이트인들은 제철기술을, 페니키아인들은 문자를, 리디아인들은 화폐주조술을, 이집트인들은 건축과 예술을 알려주었죠. 그리스의 신앙체계도 지중해 동쪽에 위치했던 다양한 문명의 종교를 참고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서양 문명의 요람으로 여겨지는 그리스 문명은 지중해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문명의 역사는 크게 크레타 문명(기원전 2500-1400년경), 미케네 문명(기원전 2000-1100년경), 암흑기(기원전 1100-800년경), 상고기(기원전 8세기-479년), 고전기(기원전 479-338년),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23-30년)로 구분됩니다. 상고기와 고전기를 가르는 기원전 479년은 그 유명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79년)이 끝난 해이며, 고전기가 끝나는 기원전 338년은 카이로네이아 전투가 끝난 해입니다.

암흑기가 끝나고 상고기와 고전기를 지나면서 그리스는 독창적인 정치체제와 문화를 발달시킵니다. 폴리스 체제, 인간 중심의 합리적 사유, 체계적인 학문의 발전 등이 그것입니다.

폴리스는 원래 ‘성채, 요새’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정복과 파괴로 점철된 암흑기에 지역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고자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살았던 것이죠. 시간이 지나며 성채들의 안팎에 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폴리스는 점차 ‘도시’나 ‘국가’를 의미하게 됩니다. 폴리스는 기원전 8세기부터 338년까지ᅠ그리스 지역의 대표적인 국가 형태로 자리잡습니다. 알렉산더의 제국으로 이어지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부분의 폴리스가 귀속되기 전까지죠. 폴리스는 대개 5000여명 규모의 작은 도시 국가 형태를 띠었습니다. 각 폴리스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공통된 특성이 있습니다. 우선 폴리스는 자유 시민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왕이나 독재자보다는 시민들 공동의 소유물이었던 것입니다. 초기에는 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했지만, 시민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참주정을 거쳐 민주정으로 이행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과정과 시민권의 성격은 폴리스마다 달랐습니다.

대표적인 폴리스가 바로 스파르타와 아테네입니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이웃 지역인 메세니아를 정복해 얻은 토지와 노동력을 기반으로 발전했습니다. 스파르타의 주민들은 자유시민, 페리오코이, 헤일로타이로 구성되었습니다. 정복민들로 구성된 헤일로타이는 일종의 국가 노예로서 농업에 종사하며 자유시민들에게 생활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주변의 주민’을 뜻하는 페리오코이는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며 납세의 의무를 졌습니다. 자유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공교육과 집단생활을 통해 군사활동에 전념했고 또 유일하게 참정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민회와 감찰관, 원로회로 구성되는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는 기원전 7세기 전설적인 입법가 리쿠르고스에 의해 정립되었습니다. 민회보다는 유력자 위주로 구성된 원로회의 권한이 더 강했기 때문에 스파르타는 민주정보다는 과두정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 연합군을 지휘했으며,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이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아테네를 이기고 그리스의 단독 패권 국가로 부상합니다.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와 조금 다른 과정을 거쳐 자신의 폴리스를 성장시켰습니다. 식민운동이 활발했던 기원전 6세기부터 교역과 수공업 생산이 늘어나면서 아테네에는 부유한 농민과 수공업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토지와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들에 맞서 정치적 영향력을 늘려갔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중갑보병 중심의 팔랑크스 전술에서 활약하기도 했죠.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델로스 동맹이 결성(기원전 478년)되면서 아테네의 민주정은 더욱 발달했습니다. 아테네는 동맹의 금고를 관리한 권한을 얻었고 전쟁은 노예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죠. 아테네 인구의 1/3 가량을 차지했던 노예들은 생업과 가사노동을 전담함으로써 다른 시민들이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델로스 동맹의 핵심 전력이었던 아테네 해군은 기존에 군사적 참여가 제한되었던 하층 시민들을 노를 젓는 병사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하층민들이 정치활동에 참여할 명분과 경제적 여건을 갖추게 해주었고요. 이처럼 아테네는 오랜 시간에 걸쳐 귀족 세력을 혁파하고 중간층, 나아가 하층민의 정치참여를 보장하는 법적 제도를 발전시켰습니다. 솔론, 페이시스트라토스, 클레이스테네스, 페리클레스 등 한번 쯤 들어본 정치가들은 이러한 발전에 기여한 지도자들입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그리스의 역사는 페르시아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듭니다. 기원전 6세기 후반에 오리엔트 지역을 통일한 페르시아는 이 시기 지중해 세계의 최강국이었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공합니다. 이 전쟁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에서 이긴 것은 그리스 연합군이었지만 페르시아의 영향력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기원전 4세기에도 페르시아는 외교적으로 그리스 정치에 빈번하게 관여합니다.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꺾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쇠퇴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스파르타 체제는 안정적이지 못했고 이후 1세기 동안 크고 작은 전쟁들이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계속되는 소모전 속에 폴리스들은 물질적 기반을 잃어버립니다. 이는 빈부격차의 확대와 군사적 업무의 용병화로 이어지고, 앞서 설명한 폴리스의 사회적 기반 역시 흔들리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는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 왕국에게 패해 예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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