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우리가 누구나 알고 있는 곳이지만 일종의 환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무도 가볼 수 없는 곳이기에 더욱이 그럴 것이다. 심지어 평양을 연구하는 학자들조차도 방문할 수 없으므로 평양의 유물이나 유적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일종의 기묘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로서 많은 유적과 유물을 남긴 평양. 이 당시의 평양에서 발견된 여러 유적과 유물을 살펴보며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더 나아가 고대의 평양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평양성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역사 속 평양은 언제나 주요 도시였다!
세계화 시대가 되었어도 여전히 가지 못해 우리에겐 환상의 공간으로 자리잡은 평양, 이곳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이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서경’으로 불리며 부수도처럼 여겨졌으나 태조 왕건이 고구려의 계승성을 강조한 만큼 평양을 중시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도 평양은 여전히 중요한 제2의 도시였다. 특히 서울에서 황해도, 평양, 의주 등을 거쳐 북경으로 건너갔으므로 중국과의 주요 교통로 역할을 했다. 그 한가운데에 평양이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도시가 된다.
시간이 흘러 분단된 이후에는 북한의 수도이자 제1의 도시가 됐다. 인구는 3백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나중에 만약 남북한 통일이 성사된다면 ‘수도를 어디로 지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이다. 훗날 평양이 통일된 한국의 수도가 되느냐의 여부를 떠나 통일된 이후에도 평양은 정치, 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본다.
왕검성과 단군릉, 평양에서 확인된 고조선 유물
평양 일대에서는 우리나라의 시조인 고조선의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다만 그 수가 많다고 하기는 어려우며 유물의 명확한 정보를 알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고조선의 수도는 ‘왕검성’이었는데 그 왕검성의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확인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평양 일대에 왕검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문헌상에는 고조선의 수도가 왕검성으로 명시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그 유적이나 성벽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혹은 이미 도시화된 곳의 어느 지하에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다음으로 볼 유적은 북한의 ‘단군릉’이다. 평양에서 조금 떨어진 강동군에 대박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바로 단군릉이 있다. 만약 우리가 북한에 방문하게 된다면 북한에서 반드시 단군릉에 데려갈 정도로 대단히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를 띤다. 형태는 고구려의 적석총을 모델로 해서 건축된 것이며 단군과 단군의 아내를 모신 곳이다.
1990년대에 단군릉이 발굴 및 재건되어 북한에서는 단군릉의 존재가 정설로 여겨졌는데 남한의 역사학자들은 상당히 회의적으로 볼 여지가 있다. 단군의 유골과 무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에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사실 주체사상에 따라 북한에서 평양의 역사성이나 대동강 문화를 강조해야 하는 정치적 필요성에 입각한 것으로 보고 있다.
평양에 있던 낙랑군, 식민주의 사학에 의해 희생되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사군이 세워진다. 그중에서도 수도인 왕검성 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낙랑군과 관련된 유물이 많이 발견됐다. 낙랑군 유적에서 나오는 고조선 계통 사람들이 남겨놓은 유물들이 꽤 있다. 이러한 낙랑군이 평양에 설치됐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됐다.
다만 낙랑군과 관련해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는 지점이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일제가 한국을 침략, 강점하고 그것을 정당화·합리화하기 위한 역사학, 일명 ‘식민주의 사학’이 팽배했다. 그래서 ‘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는가?’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역사학 모델이 만들어져 제시됐다. 대표적으로 악명 높은 ‘일선동조론’, ‘정체성론’ 등과 같은 논리들이 펼쳐졌다.
이러한 공격들을 거부하려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낙랑군이다. 낙랑군에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옛날부터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고구려 미천왕은 평양에 있던 낙랑군을 점령해 평양을 고구려 영역으로 만들었다. 또한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했기 때문이다.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확인이 가능한 내용이다. 조선시대로 넘어가도 <지리지>와 같은 역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로 넘어와서 일본인들이 ‘고고학’이라는 서구의 새로운 학문을 바탕으로 유적과 유물을 파헤치게 된다. 실제로 무덤을 발굴해보니 중국제 유물이 다수 확인됐다. 기존에는 문헌적으로나 사람들의 인식 속에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으로 인지됐다면, 근대에는 아예 물증까지 나온 것이다. 이를 두고 일부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고조선이 한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낙랑군이 세워졌으니, 이 낙랑군을 일제 식민지와 등치해 버린다. 결국 우리나라의 시조인 고조선부터 식민지화됐다고 볼 수 있으므로 상당한 불쾌감을 유발해 버린 것이다.
고구려 신도시의 길, 평양에 여전히 남아있어!
지금 우리가 평양성이라고 부르는 곳은 고구려 시기엔 ‘장안성’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평양 내에서도 천도가 다시 진행됐다. 장수왕이 처음 내려왔을 때는 평양으로부터 동북부 쪽으로 떨어진 대성산 남쪽에 성을 짓고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동강과 대성산 사이에 굉장히 넓은 평지 공간이 있는데 그곳이 아마 전기 평양 사람들의 주거지였을 것으로 본다. 왜냐 하면 대성산 남쪽 기슭에 고구려 무덤이 상당수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전기 평양성 시기에는 외곽 성이 없었다. 왕을 보호하는 왕성은 존재했지만 일반 백성들은 평지 공간에서 지냈던 것이다.
또한 이 대성산 부근은 평양의 중심인 낙랑군과는 거리가 다소 있다. 이를 통해 천도는 했지만 중심 세력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적 구성이 다소 이질적인 것이다. 국내 계통의 사람들이 사는 영역과 원래 낙랑군 근처에 사람들이 사는 영역으로 나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성지도 등을 이용해 서울을 보게 되면 강북 지역(구 시가지)은 도로가 비교적 지저분한 편에 속한다. 반면 과거에 허허벌판이었다가 신도시가 들어선 강남 지역은 길이 반듯하게 들어섰다. 이러한 현상이 신도시의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반면 북한의 위성사진을 살펴보면 중심 시가지 아래의 길도 반듯하다. 왜냐 하면 고구려 때 신도시의 길이 그대로 남아서 여전히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따라 근대의 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고구려 당시 유적의 흔적들이 현재까지도 여전히 남아있는 셈이다.
기경량 교수(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