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속 연변의 재조명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반도 최대 비극 한국전쟁.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국전쟁이 굉장히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그 한국전쟁과 연변이라는 지역 간에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생소할 것이다. 연변이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데 왜 중요할까? 또 그것이 한국 현대사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 이 주제를 통해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 중 특히 ‘국민국가의 경계’가 지니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미국 공군의 폭격에 맞서 북한의 후방기지가 된 연변?

북한은 한국전쟁 기간 내내 미공군의 폭격에 시달렸다. 특히 1950년 11월 중순 이후에는 읍 단위 중소도시들까지 미공군의 폭격 대상이 되고 북한 전역은 폐허가 됐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까지 북진을 계속했기 때문에 북한은 직접적인 전투지역이 됐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군대 재건과 병력 충원, 부상병 치료라든가 피난처럼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활동이 북한 내에서는 불가능해지게 된다. 그런데도 북한은 3년 가까이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는데 이는 연변의 존재 때문이었다.

6·25전쟁 당시 B-29의 북한 폭격 장면. (출처: 주한유엔군사령부)

연변은 북한의 주권이 미치는 ‘제1후방’이 소멸 직전에 몰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북한의 ‘제2후방’이 되어준다. 먼저 북한의 공공기관과 주요 인물이 연변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러한 조직적인 피난뿐 아니라 전쟁 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 민간인들도 만주로 대거 넘어간다. 만주와 북한은 강 건너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간인들도 어렵지 않게 이동할 수 있었다. 연변의 정식 통계에 잡힌 북한 난민만 1만 2천 명에 가까운데, 통계에 누락된 사람들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변에서는 북한 난민 접수기관과 전쟁고아 수용기관을 운영하며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연변, 군사기지에 이어 의료활동의 거점까지!

북한의 후방기지인 연변은 북한군이 전투를 계속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군사기지가 된다. 1950년 10월 이후 북한군 최소 11만 5천 명이 만주 각지로 이동하여 부대를 재편한다. 북한군은 북한까지 철도로 이동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주둔하면서 재편 작업을 진행했다. 재편이 끝나면 북한으로 돌아가 다시 전투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북한은 해군학교를 제외한 모든 군사교육기관을 만주로 이동시켰다. 만주 각지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북한군은 한반도로 복귀하여 전투를 이어갔다. 또한 북한은 연변에 거주하는 조선인 청년들을 북한군으로 흡수하여 병력을 충원했다.

한편 연변은 의료활동의 거점이기도 했다. 전쟁은 수많은 의료 인력을 필요로 하는데 그 폭발적인 수요를 채워준 곳이 바로 연변이었다. 연변에 북한 의료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 만들어져서 이곳에서 교육받은 연변 사람들이 북한으로 건너가 전투를 지원했다. 우선 전쟁으로 발생한 수많은 부상병들이 연변으로 이동해 전쟁을 피하고 치료를 받았다. 연변의 기존 병원들이 북한 전쟁 수행을 위한 후방병원이 된 것이다. 연변 소재 병원에서 치료한 북한군 부상자는 1950년 하반기에만 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연변과 만주 각지에는 북한군 소속 병원과 상이군인휴양소도 의료활동을 지속했는데 북한 원산에서 연변으로 이동한 해군병원이 대표적이다.

1951년 6월에 행주(幸州)부근에서 찍힌 것으로 알려진 '소녀와 탱크'

하나 더 흥미로운 점은 북한에 대한 의료지원을 위해 파견되었던 동유럽 국가 의료진들도 상당 기간 만주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헝가리 의료진은 1950년 12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만주의 대도시 장춘에서 활동했다. 헝가리 의료지원단이 근무한 병원의 환자는 모두 북한군들이었고, 헝가리 의사를 보좌하는 의료보조원 역시 북한 사람들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장춘의 헝가리병원은 북한 정부가 관리하는 후방병원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일부인 연변이 어떻게 북한의 후방이 됐을까?

지금까지 북한의 후방기지가 된 연변의 모습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봤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당시에도 연변은 중국의 일부였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북한의 후방이 될 수 있었을까? 먼저 한국전쟁 이전부터 활발하게 진행된 북한-연변 간 인적 교류를 들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 중국에서도 국공내전이 있었다. 이 시기에 북한과 연변은 긴밀한 군사협력을 진행했다. 북한 청년들이 연변에 가서 중국공산당 부대에 참가하기도 하고, 반대로 연변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부대가 북한에 들어와 북한군이 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출처: 위키피디아)

교육 분야에서도 교차점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북한 최고 엘리트들을 길러내는 만경대혁명학원의 초기 입학자 상당수가 연변 출신이다. 북한은 연변에서 발행되었던 신문에 광고를 내거나 직접 관료를 파견해서 만경대혁명학원 입학자들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현재도 연변 최고 대학인 연변대학은 북한의 영항력 아래 설립됐다. 실제로 연변대학의 설립과정, 교육체제, 강의내용과 방법 등은 김일성종합대학과 굉장히 유사하다. 중국공산당은 연변대학을 김일성종합대학의 분교라는 평가까지 남겼다. 이처럼 전쟁 이전부터 진행된 북한과 연변 간의 인적 교류,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정서적 유대감이 한국전쟁기 연변의 북한 후방기지화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

민족 중심의 한반도, 복합적인 역사의 열린 공간으로 이해하자!

마지막으로 북한의 제2후방으로서 연변이 보여준 모습을 통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역사적 측면에서 생각했을 때 제2후방 연변의 존재가 없었다면 적어도 1951년 상반기 시점에 북한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달리 말하면 전쟁이 그때 끝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 정부의 주권이 미치는 ‘제1 후방’이 소멸 직전에 몰린 이후, 연변은 전투와 폭격의 위험이 없는 안전하고 완전한 후방으로서 북한이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전쟁의 전개에 영향을 준 결정적인 변수 중 하나였다.

이처럼 북한의 전쟁 수행,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과 결과는 남과 북, 유엔군, 중국군뿐 아니라 연변까지 살펴봐야 보다 완벽한 이해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한국전쟁사 연구에서 연변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현재의 물리적 국경의 벽 때문이었고 이는 한국 현대사의 공간적 경계와 인식론적 지평에 확장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오늘 살펴본 한국전쟁기 북한의 제2 후방 연변이 그러했던 것처럼,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한국 현대사 연구는 더 많은 역사적 사실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해줄 수 있다. 이를 위해 민족과 국가 중심으로 이해해온 한반도를 다중적 공간, 복합적인 역사의 열린 장소로 이해하고 국민국가의 경계에서 망각된 여러 주체를 한국 현대사의 범주 안에서 적극적으로 재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미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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