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_읽지 않은 책 깊이 읽기

저자 소개

마이클 샌델(1953-)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철학자. 매사추세츠 주에 위치한 브랜다이스 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80년 27살의 나이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2년 뒤인 1982년에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로 불리던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책 『정의의 한계』를 발표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현재까지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재임하며 저스티스(Justice), 즉 '정의’라는 이름의 정치철학 강의를 진행 중이다.

대표 저서로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공정하다는 착각』,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왜 도덕인가』등이 있다.

책을 쓰게 된 경위 및 배경

오랜 기간 미국 하버드대에서 재직한 철학 교수의 책이 그의 조국보다도 더 많이 (그것도 훨씬 더 많이) 팔린 곳이 하나 있다. 어디일까? 바로 이곳 ‘한국’이다. 그리 인기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철학 분야’의 책은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손에 오게 되었을까?

이야기는 책의 최초 출간 약 3년 전인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한 김영사는 당시 한 해외 에이전시로부터 연락을 받게 된다. 마이클 샌델이라는 하버드대 철학과의 교수가 자신이 진행 중인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집필에 들어갔는데 미리 계약할 의사가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김영사의 내부 관계자들은 내부 회의를 거친 뒤에도 여러 이유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원고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자기계발서나 가벼운 에세이가 주도하는 출판 시장에서 ‘정의’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 인문서가 과연 먹힐지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김영사는 이 책, 아니 예비 원고의 계약을 선택했다. 사회가 성숙기에 접어 들었기에 정의를 말하는 내용이 다소 무겁게 느껴지더라도 울림을 줄 수 있는 주제가 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하버드’라는 타이틀이 국내 독자들에게 높은 신뢰도와 관심도를 제공한다는 점도 주요한 고려대상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옳은 판단이 되었다. 인문서가 8년 만에 주간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오른 것이다. 관심은 몇 주에서 그치지 않았다. 출간 3개월 남짓 만에 30만 부의 판매고를 달성했으며, 이듬해 초에는 100만 부를 돌파했다. 이른바 ‘초대박’이 터진 것이다.

책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바로 책이 국내 출간된 지 약 4년 여가 지난 2014년 경 출판사가 변경된 것이다. 이미 큰 성공을 거둔 도서가 출판사를 바꿔 나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우 드문 사례였다. 이로 인해 당시 계약에 성공한 새로운 출판사와 판권을 빼앗긴(?) 기존 출판사 사이에선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명목 아래 한동안 날선 공방이 이어지기도 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기에 이런 뒷 이야기까지 생겨나게 된 것일까? 지금부터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책의 내용

당신은 철로를 고치는 수리공이다. 어느 날 당신은 달려 오는 기차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폭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반대쪽 철로를 살펴보니 기차의 경로에 다섯 명의 작업자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들이 기차를 피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다. 이때 당신은 당신 눈 앞에 놓인 스위치를 눌러 기차의 진로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차의 진로가 바뀌면 그 철로에는 작업자가 오로지 한 명 뿐이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기차를 그대로 두어 다섯 명이 죽게 할 것인가, 아니면 기차의 선로를 바꿔 한 명을 죽게 할 것인가?

위의 질문에 선택을 마쳤다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당신은 이제 수리공이 아니라 육교 위에서 철로를 바라보던 구경꾼이다. 앞선 상황과 마찬가지로 현재 기차는 폭주 중이고, 선로 위에는 여전히 다섯 명의 작업자들이 서 있다. 심지어 이번에는 이들을 피할 수 있는 다른 철로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이때 당신은 당신 옆에 서 있는 덩치 큰 사람을 밀어 떨어뜨리면 기차를 멈춰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옆 사람을 희생시켜 다섯 사람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기차를 그대로 두어 다섯 명이 죽게 만들 것인가?

정의(正義)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정의가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옳은 것 혹은 참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어느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으며, 어떤 기준과 잣대로 보아도 ‘참’인 것이 바로 정의라고 여기는 것이다. 만약 이 설명에 공감했다면 위의 사례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과연 정의로운 행동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을 희생시켜 다섯 명의 생명을 구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선택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이유(참고로 어느 연구소의 연구 결과 첫 번째 사례에 대해서 선로를 변경하겠다고 응답한 사례는 89%에 달했지만, 두 번째 사례에 대해서 같은 대답을 한 경우는 11%에 불과했다.)는 대체 무엇인가?

샌델은 이처럼 주어진 상황과 여건, 접근 방식 등에 따라 정의(正義)의 정의(定義)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정의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정의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보기를 제안한다.

샌델이 정의에 관해 첫 번째로 주목하는 견해는 바로 공리주의이다. 공리주의는 영국의 18세기 철학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에서 시작한다. 그는 정의란 사회 전체의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는 것이라는 이른바 ‘양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다. 즉, 사회 구성원의 행복 총량이 늘어날 때, 그 사회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윤리학은 기존의 관념적인 윤리학과 비교해 현실 적용에 용이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명확한 한계를 지니기도 했다. 우선 첫 번째는 소수에 대한 차별 문제를 들 수 있다. 사회 전체의 행복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소수 혹은 개인의 행복이 무시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고대 로마 시대에는 수만 명의 군중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명목으로 맹수와 노예 혹은 기독교인들을 경기장에 풀어놓았다. 1~2명의 고통 덕분(?)에 수 만 명이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그것을 진정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두 번째 한계는 측정 기준의 현실 적용 가능성에 관한 문제이다. 벤담은 일정한 기준을 바탕으로 행복을 측정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인 형태의 도덕 원칙을 수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양한 이해관계가 뒤섞여 있는 현실 사회에서 이러한 기준의 무의미할 때가 많다. 가령, 벤담의 기준을 바탕으로 자동차에 안전장치를 달아 얻게 되는 이익(사망자, 부상자 수의 감소 등)보다 안전장치를 달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장치 개발비, 제작비, 설치비 등)이 더 크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면 우리는 그 안전장치를 설치해야 할까,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

그의 제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질적 공리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계산이 아닌 ‘인간’을 중심에 내세움으로써 공리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쾌락은 저급 쾌락과 고급 쾌락으로 구분되며, 제대로 된 의식을 가진 사람이 둘 모두를 경험할 경우 그중 반드시 고급 쾌락을 선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과연 사람들이 매번 질적으로 더 훌륭한 ‘고급 쾌락’을 선택할 것이냐는 반박이 대표적이다. 일과 공부에 잔뜩 지친 오늘밤, 당신은 다음 중 무엇을 선택하고 싶은가. 유튜브나 OTT를 통해 즐겁고 유쾌한 영상 보기? 아니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공자나 장자 같은 옛날 철학자들의 길고 지루한 책 읽기?

샌델이 두 번째로 주목한 견해는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는 말 그대로 인간의 ‘자유’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중에서도 개인의 자유를 가장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자유지상주의자’들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빌 게이츠 같은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주자는 주장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공리주의자들은 이 주장에 찬성할 것이다. 몇몇 부자들의 행복은 줄어들지 모르지만, 사회 구성원 전체의 행복은 크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이 의견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세상 어떤 가치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한 이 가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이런 주장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개인의 자유 의사를 바탕으로 한 결정이 과연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느냐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먹혀줄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냈다고 생각해보자. (실제로 그랬다.) 그리고 지원자 중 한 사람을 토막 살해하여 일부를 먹어치웠다고도 생각해보자. (이것도 실제 이야기이다.) 당신이 만약 자유주의자라면 당신은 자유 의사를 바탕으로 먹고, 먹힌 두 사람의 행동이 과연 그릇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자유지상주의자가 아니다.

Prompt : Draw me a man who's agonizing over the newspaper, painting, expressive/ Image by Stable Diffusion

이마누엘 칸트와 존 롤스도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했지만, 그 이유와 방향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의 것과는 달랐다. 먼저 칸트는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결과가 아닌 그 행동을 한 이유, 즉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고 주문한다. 즉, 어떤 행동을 할 때의 원칙들이 사회의 보편타당한 규칙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도 칸트의 이러한 입장을 일부 계승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는 사회의 안정과 유지를 위해 구성원들 사이에 계약이 이루어졌다는 이른바 ‘사회계약론’의 이론적 근거를 찾는다. 그는 어떠한 이유로 우리가 자신의 상황(계층, 성별, 인종, 종교, 정치 성향 등)을 잊은 채, 한 자리에 모여 사회의 주요 원칙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가정한다. 롤스는 이 자리에서 자유롭게 합의된 원칙은 정의로울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개개인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모두가 ‘가장 옳은 것’을 택해 얻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샌델이 마지막으로 주목한 견해는 ‘공동체주의’이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먼 옛날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세기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중립적인’ 정의의 원칙을 찾아내고자 한 근현대 철학자들의 시도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는 정의는 중립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자격 있는 이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것이 진정한 정의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즉, 개인의 권리(right)보다는 사회 전체의 선(good)에 초점을 맞춘 윤리학을 펼친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어느 날 사람들에게 바이올린을 모두 한 대씩 나눠주게 되었다. 누가 스트라디바리우스(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와 그의 집안에서 만든 현악기를 통칭하는 말. 특유의 우아하면서 세련된 음색으로 전무후무한 세기의 명기로 불린다)를 가져야 할까. 그냥 랜덤으로? 아니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바이올린을 가장 잘 켜는 사람이 스트라디바리우스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샌델은 이러한 공동체주의적 사고관이 자신의 입장에 가장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 좋은 삶에 대한 공동의 고민이 더해졌을 때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어떤 정치가 우리를 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지 고민해 보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으로 공동체적 시민 의식을 키우는 교육,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끊임없는 토론, 불평등 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과 해결 방안에 대한 논의, 도덕적인 참여 정치에 대한 강조 등을 언급한다. 물론 그 역시 아직 ‘이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는 부연을 함께 붙인 채로 말이다.

책의 영향력, 파급효과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의란 무엇인가』는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이른바 ‘정의’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국내 출간 약 1년 만에 100만 부가 넘게 팔려나갔고, 그로부터 약 6년 뒤인 2017년에는 200만 부를 돌파하며 국내 출간된 철학 도서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2012년 연세대에서 열린 샌델의 강연에는 1만 5,000여 명의 청중이 몰렸다. 또한 저자 본인이 프로야구 경기의 시구자로 초청 받거나, 지상파 채널을 통해 하버드 대학에서의 실제 강의 모습이 송출되는 등 저자 센델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대체 왜 이 책에 열광했을까? 우선 표면적으로는 마케팅 전략의 승리를 말할 수 있다. 책을 최초로 국내에 소개한 김영사는 당시 대부분의 출판사가 책 출간을 꺼려하던 지방 선거 직전을 출간일로 정했다. 선거 이후 승패의 명암이 갈리며 이 책에 담긴 정의라는 주제가 자주 거론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국인에게 높은 브랜드 파워를 발휘하는 ‘하버드 대학 교수’라는 저자의 이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표지 앞뒤에 걸쳐 샌델 교수의 실제 강의가 펼쳐지고 있는 웅장한 강의실의 모습이 담겼으며, 뒷 표지에 담긴 추천사 중 절반을 하버드대 재학생의 글로 채워 다시 한번 ‘하버드대 강의’라는 콘셉트를 강조했다.

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의 근본적인 이유는 불공정한 한국 사회에 깔린 불신, 그리고 이를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들의 강한 열망에서 그 뿌리를 찾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에 따르면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답한 한국인은 전체 응답자의 74%에 달했다. 다시 말해, 4명 중 3명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공정하지 못한 구조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겼다는 이야기이다. 정부가 나서서 사회경제적 불리함을 치유해야 한다고 믿는 비율도 무려 93%에 달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한 끝에 다다른 결과가 불평등과 차별로 점철된 사회였다니,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저 멀리 미국 ‘명문대’ 교수의 책을 펼친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열풍은 사그라들었지만 사회 전반에 깔린 불공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아니 더 심화되어만 가는 중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이 책이 더 절실히 필요한 시점은 2010년의 그날이 아닌 바로 지금인지도 모른다.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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