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계’와 68운동

앞서 우리는 전쟁 이후 형성된 새로운 국제질서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가 끝나고 미국과 소련이 화해 분위기에 들어가면서 1960년대 중반 세계는 평화와 번영의 길로 접어드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서구 중심 국가들의 시선에서만 그랬죠. 제 3세계로 분류되는 국가들에게 이 시기는 혼란과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서구 제국의 식민지였다가 2차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이었어요.

전쟁이 끝나고는 매우 어려운 선택이 신생 독립국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소련 중 하나를 택해야 했고 경제적으로는 낙후된 국민경제를 발전시켜야 했던 거죠. 미국과 소련은 이들 국가에게 각자의 비전을 제시하는 한편,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공작과 폭력을 불사하기도 했어요. 대다수의 국가들은 이러한 난제와 국내에 산적한 갈등이 겹쳐 발전이 더뎠고 내전까지 겪기도 했습니다. 1990년까지 크고 작은 갈등으로 2000만 여명이 사망했을 정도였죠.

주변부에서의 갈등은 중심부 세계와 때때로 연결되었습니다. 발전된 미디어 기술 덕분에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게 가능해진 덕분이었죠. 제3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던 베트남 전쟁은 전 세계에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서구 중심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죠.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지만, 사실 중심부 국가들 역시 사회적인 모순이 불거지고 있었습니다. 인종과 성별로 인한 차별, 권위주의, 환경문제 등이 그것이었죠. 세계 각국에서는 이 문제들의 해결을 촉구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이 부상하던 중이었습니다. 1960년대에 베트남 전쟁이 보여준 전쟁의 참상은 강력한 반전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켰고, 이 흐름을 타고 1968년 세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변화 요구가 터져 나왔습니다. 68운동이 시작된 것이었죠.

68운동은 전후에 태어나 경제성장의 과실을 누렸던 베이비붐 세대가 주도했습니다. 주로 대학생이었던 이들은 전통적인 사회운동의 주제였던 참정권이나 노동자의 권리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어요. 대신에 가부장제의 권위, 성에 대한 억압,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 같은 것들에 저항했죠.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대학 교정에서 반전시위를 조직하거나 공개토론회를 열었고, 생활공동체를 만들거나 행진을 기획했어요.

68운동은 정치적으로 조직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연대가 이루어졌던 프랑스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민권운동이 급진화되었던 미국에서는 잠깐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국 정권의 퇴진이나 항복을 받아내지는 못했어요. 68운동은 조직이 아니라 공감을 토대로 진행되었고 기성세력을 대체할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쿠바 정부를 전복시킨 체 게바라를 동경했지만, 쿠바보다 훨씬 강력한 중심부 국가를 전복시킬 무력은 없었죠. 결국 시민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한 68운동은 빠르게 퇴조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운동과 문화의 영역에서 68운동이 거둔 성과는 분명했어요. 이전에 진행되고 있던 여성운동, 반핵운동, 환경운동, 성적 소수자 운동은 68운동을 계기로 지지자들을 크게 늘릴 수 있었죠. 문화영역에서는 전위적인 시도가 개진되고 권위주의와 검열이 사라졌고요. 이후 베이비붐 세대가 다시 제도권에 진출하면서 68운동의 가치가 현실정치에서 다시 영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에 영국에서는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독일에서는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집권했고, 이들이 구성한 정부 요직에는 68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죠.

19세기의 사회운동이 직접적인 정치적, 경제적 관계에서 비롯되었다면, 20세기의 사회운동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사회적 위치나 정체성에 따른 차별, 자본주의 사회가 가져온 지구적 변화, 전쟁과 폭력 등에 저항하는 것이었죠. 어쩌면 아직도 우리는 68운동이 제시한 가치들을 제도적으로 반영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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