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한국, 중국을 혐오하다
“중국”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50대 이상의 ‘상사맨’의 경우 젊었을 적 기억을 더듬으며 ‘기회의 땅’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반면에 대다수 한국인에게는 분명 중국은 ‘혐오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최근의 분위기는 후자의 느낌이 훨씬 강하게 풍기죠.
생각해보면 이러한 분위기는 한중수교 이후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급격한 반전이기도 합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국인이 느끼는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게 되는데요.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고작 100여 년 남짓한 시간 동안 거침없이 변화해갔습니다.
오죽하면 최근에는 “짱깨”라는 표현에 담긴 중국 혐오 현상을 분석한 두꺼운 책도 나왔겠나 싶습니다. 바로 광운대 김희교 교수가 쓴 《짱깨주의의 탄생》입니다. 이 책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개인 SNS에 짧은 감상평까지 남기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죠. 감상평은 간단했습니다.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이며, 우리 외교가 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다. 언론이 전하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니다, 세상사를 언론의 눈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는 눈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라는 말이었죠.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상상해보자면 사실 조금 도전적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반중혐오’ 현상은 언론이 만들고 있으며, 중국을 대하는 태도와 외교적 입장은 ‘반중 일변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풀이되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한국 정부의 ‘대중국 외교 노선’과 일치하는 말이었기에 그리 어색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짱깨주의의 탄생》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
그럼 책의 내용은 어떨까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읽어 낸 그대로입니다. 책은 냉전 시기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의 세계체제는 ‘동구’의 공산권을 배제하는 체제였다고 설명합니다. 더불어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 간의 통합이 촉진되었고, 이 과정에서 러시아를 비롯한 중국이 적대국가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1970년대 이른바 ‘데탕트 국면’에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끌어 냈고, 더 나아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중국 간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경제교류가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역전되었다는 거죠. 하지만 미국은 곧 대규모 인구를 앞세운 중국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미국의 경제력을 위협하는 수준에 다다르자, 미국이 또다시 새로운 냉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중국을 전방위로 봉쇄하려고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자는 중국이 문제여서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중국봉쇄 전략 때문에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문제는 미국의 전략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제 “유럽과 미국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탈유럽중심주의’와 ‘탈식민주의’ 시각으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바라봐야 할 시점이라고 충고하고 있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짱깨”라는 단어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이 용어의 역사성에 집중하죠. 1894년 청일전쟁 전 중국인을 혐오하지 않던 조선인들이 중국의 청일전쟁 패배 이후 중국인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다는 겁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중국인을 열등하고 미개한 국민”이라는 일종의 ‘프로파간다’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후 해방과 미군정의 통치, 그리고 한국전쟁에서의 ‘중공군 참전’, 마지막으로 반공주의 확산에 따라 중국에 대한 혐오감이 증폭되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에 말미암아, 기저에 깔려 있던 중국에 대한 혐오 감정이 중국의 급격한 부상과 ‘미중 충돌’의 가속화로 인해 더욱 커져만 간다는 말이죠. 이 혐오의 감정은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의 근원을 중국으로부터 찾는 데에까지 나아간다고 경고합니다. “무조건 중국이 나쁘다”는 말로 이어진다는 거죠. “중국발 미세먼지”, “우한 바이러스”, “중화패권주의” 등의 용어가 대표적이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저자는 이 프레임을 한국의 정치 상황과 연결시키며 한국의 ‘보수주의’를 끌고 옵니다. 이 프레임이 만들어진 근간에는 한국의 보수주의 세력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결국 저자가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무엇일까요? 사실 결론은 조금 허무합니다. “중국이 어디로 가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인지 묻자”는 겁니다. 답을 내리기보다 ‘앞으로 중국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자’정도의 제안이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탈식민적’ 세계체제로 나아가는 허무한 이야기도 함께 말이죠.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평화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도전적이고, 현실 비판적인 문제제기에 비해, 사실 결론은 조금 허무합니다. 물론 시론적이고 대중적인 책에서 더 어렵고, 복잡한 해답을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죠. 게다가 역사학이 베이스가 된 이 책에서 외교적이고 국제관계적인 해답을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진짜 문제는 저자가 문제제기 과정에서 던진 많은 ‘떡밥’들(가령 탈식민의 문제라던가, 우리에게 중국이 무엇인지를 묻는 근원적인 질문들)이 책 안에서 해결되었느냐 일 겁니다. 그건 아마 책을 읽는 저자분들의 판단에 달려 있겠죠.
자, 이제 책 이야기는 잠깐 접어두고 이 책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김희교 교수도 바로 이 지점에 주목했으니, 한국에서 “짱깨”라는 혐오 표현이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현실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 중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역사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잠깐, 이 글을 읽는 지금 순간만큼은 ‘혐오’와 같은 선입견을 걷어 내봅시다. 한국과 중국의 진정 어떤 사이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의 선입견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그 역사적 과정을 살펴본 뒤에 각자의 생각을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워도 ‘형님’의 나라, 20c 이전 중국
근대 이전, 중국은 세계를 주름잡던 나라였습니다. 줄곧 하나의 통일왕조로만 이어져 왔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중원(지금의 화북지방)을 장악한 역대 중국의 제국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나라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때문에 좁게는 동아시아, 넓게는 아시아 전역에서 중국이 주도해온 국제관계는 ‘조공과 책봉 관계’로 압축됩니다. 강대국인 중국과 주변국들이 평화와 질서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유지되어 온 국제질서의 형식입니다. 한반도에 터를 두었던 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살기 위해서라면 미워도 중원을 장악한 제국은 곧 ‘형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공-책봉 관계’라는 이 특수한 관계는 상상하는 것처럼 굴욕적이거나 일방적인 종속의 관계는 아닙니다. 본래 조공은 주나라의 종법적 봉건제도 하에서 제후가 정기적으로 천자인 ‘형님’에게 조관(朝觀)하고 공물을 바쳐서 ‘군신’ 간의 의리를 밝히고 결속을 공고히 하는 정도의 정치적 의례입니다. 서로 간의 ‘위아래’ 관계를 명확히 하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명-청 교체기에 한 차례 큰 풍파를 겪기는 했지만, 조선은 여전히 중원을 장악한 청나라를 향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습니다. 조선인에게 중국은 단순히 외교적 언사로서의 ‘형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문화의 중심이며, 유행의 선봉이었습니다. 조선인에게 중국은 곧 가장 앞선, 따라가야‘만’하는, 선진 그 자체였습니다.
📃몰려오는 서구 문명, 무너지는 ‘중화’
바야흐로 19세기, 세상이 변했습니다. 중국이 ‘선진’이던 시절은 무너졌습니다. 중국은 ‘구태’가 되었고, 조선에서 중국을 따르는 이들은 조선 ‘독립’을 방해하는 뒤떨어진 ‘구악’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적어도 러일전쟁 이전까지 조선에서 발화된 “독립”이라는 단어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습니다. 지금 서대문에 남아있는 독립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국을 향한 조선인의 시선에 드라마틱한 반전이 생긴 것이지요.
무너지는 와중에도 중국은 조선을 쉽게 놔주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중국은 전통시대의 ‘조공-책봉 관계’를 근대주권국가 간의 ‘식민-피식민 관계’로 전환하려 했습니다. 노골적인 움직임은 1882년 조선과 청나라 간의 첫 번째 근대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서 드러납니다. 표면상으로 근대 서양 제국의 조약 체결의 형식을 모방했지만, 정작 내용은 명확한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종속성을 명문화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이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이고, 각 대등 국가간의 일체 균점(均霑)하는 예와는 다르다.”
장정의 첫머리입니다. 이 문장 하나로 한국과 중국이 근대 이후 어떤 조건 속에서 첫 관계를 맺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이후 치외법권을 비롯 개항구의 해상방위를 스스로 담당하고 연안 어업 등의 특수 권익을 독점하는 등 조선에서의 초월적인 지위를 누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더 이상 스스로의 생각처럼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열강은 청나라와 조선 간의 종속관계를 무시하고 청나라의 특수권익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도 더욱 노골적이었습니다. 1883년 6월 22일에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하고 제42조에서 최혜국 대우를 규정해 청나라의 이익 독점은 사실상 일본에 균점시켜 버립니다.
이후 조선 땅에서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청일전쟁입니다. 조선을 둘러싼 일본과 중국 간의 전쟁에서 중국은 처절하게 패배합니다. 전통시대의 외교질서를 근대적 조약 시스템으로 어설프게 활용하고자 했던 중국의 야욕은 완벽히 실패했습니다. 조선에게 중국은 근대화에 실패한 ‘종이호랑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린 겁니다.
📃다시 시작된 혐오, 멈출 수 있을까?
그 뒤의 역사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중국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국공내전이 종식되었고, 이후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지원군으로 참전합니다. 당연하게도 1992년 한중수교 이전까지 한국인에게 “중국”이라는 이름은 대만을 의미했고, 지금의 중국은 “중공”이라고 불렸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중국과 한국은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입니다.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식민지 시기 혐오의 감정에 전쟁을 치른 ‘적국’의 이미지까지 더해진 것이었죠.
그 상태로 맞이한 ‘한중수교’였습니다. 처음 많은 기업들에게는 ‘기회의 땅’으로 불리며 긍정의 이미지가 생기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인 혐오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중국의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움직임에 발맞춘 주변국들과의 역사 왜곡 논란은 이 감정에 불을 지폈습니다. 아마도 당분간 이 감정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한국인의 중국인 혐오에 쌍을 이루는 감정이 중국인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 천 년을 중국에 종속되어 살던 소국” 주제에 ‘건방지게’ 미국을 믿고 중국을 미워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서로를 향한 이 혐오와 멸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만들어졌습니다. 전통과 근대의 그 사이에서 동아시아는 탈역사적인 방향으로 왜곡된 근대화를 맞이 했습니다. 이는 한국과 중국 모두에게 해당 됩니다. 이 감정의 끝에는 곧 피해자의 입장에서 근대를 맞이했던 공통의 역사가 있는 겁니다.
서로 간의 이 혐오의 시작점을 서로가 다시, 그리고 함께 곱씹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역사는 서로를 향한 칼날이 아니라 화해의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어쩌면 김희교 교수가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평화체제’라는 표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