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간첩이라고요..?

지난해 11월 9일, 조업 도중 납북된 후 귀환해 반공법 위반 혐의 등으로 처벌을 받은 어부들이 53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로 인해 납북귀환어부 사건은 피해자에게 부당한 처벌임이 밝혀졌음에도 이 사건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납북귀환어부 피해사건’의 배경과 피해 사례와 더불어 이 사건으로 발생한 아픔을 치유하는 방안과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가고자 한다.

북한에 납치됐다가 겨우 돌아왔는데 내가 간첩이라니?

‘납북귀환어부’란 세 단어가 합쳐진 표현으로 풀어서 설명하자면 ‘납북(북한에 납치됨)’+‘귀환(다시 돌아옴)’+‘어부(북한에 납치됐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들의 직업이 어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 사건은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벌어졌으며 구체적인 피해 대상은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조업을 하는 도중에 북한 배에 납치됐다가 돌아온 어민들이다.

지난 1985년 3월 열린 납북귀환어부들의 합동 기자회견 모습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들이 북한에 있다가 돌아온 사실로 인해 당시 한국 정부로부터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북한에 납치됐다가 남한으로 겨우 돌아온 어민들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귀환되자마자 경찰에 끌려가고 말았다. 당시 한국 정부는 남북이 분단돼 있다 보니 북한에 머물다가 남한에 온 것만으로도 어민들이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등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연행하고 구금하는 과정에서 고문 등의 인권 침해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들을 보호해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인데 오히려 국가에 의해 어부들의 피해가 악화되는 상황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의도된 국가폭력사건’ 혹은 ‘국가(공권력) 주도 인권침해사건’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우월함을 과시하고자 했던 북한, 어민들을 납치하다!

당시 정부에서 낸 통계에 따르면 서해안과 동해안을 합쳐 3천 6백 명이 넘는 납북귀환어부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중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한 어부도 있는데, 이들의 규모는 대략 4백 명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납북됐다가 남한으로 못 돌아온(미귀환) 어민들의 경우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무려 3천 명이 넘는 어민들을 납치해간 북한.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 정치적인 영향이 컸을 것이다. 2023년 현재와는 달리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의 경제 상황은 남한보다 월등히 좋았다. 그래서 당시의 북한이 어부를 납치해 가는 선전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경제 상황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됐다고 볼 수 있다.

이후의 분석에 따르면 남북한이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게 된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시기 즈음에 어부 납북 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즉, 남북 공동 성명과 관련해 이 시기 남북 관계에서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정에 힘이 실리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어민들이 북한에 납치된 당시 북한에서 이들을 크게 학대하거나 홀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북 공동 성명 당시에도 이들을 인질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어민들을 잘 대하거나 견학을 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한국 사회에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이기를 원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어로저지선을 넘었을 뿐인데 반공법을 위반했다고?

어로저지선이란 우리 어선군을 보호하고 이들의 납북을 방지하고자 설정한 조업규제선을 의미한다. 현재의 어로저지선은 우리가 흔히 아는 38선 휴전선과 일치한다. 반면 납북귀환어부 사건이 발생한 당시의 바다에는 군사분계선과 같은 명확한 경계선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선박 기술을 이용하더라도 남북의 경계를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 시기에 조업을 한 어민들의 말에 따르면 안개가 껴있는 날도 있었고, 이러한 날씨에 납치된 경우도 비일비재였다. ‘어로저지선’의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어민들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와는 달리 어로저지선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정부에서 별도로 공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풀려나 귀환하는 어부들

어로저지선이 수시로 바뀌는 것도 한몫하는데, 1968년 무장 공비들이 동해안에 오면서 안보 위기가 있었는데 그 이후 어로저지선을 더 남쪽으로 내린 것이다. 어부들 입장에서는 조업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 불리해졌고 어로저지선이 내려왔는지조차 알지 못해 월선 여부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이 실제로 월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어부들을 납치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들을 가리켜 한국 정부에서는 ‘바다에서 선을 넘었다(월선)는 것은 수산업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문제는 어민들이 조업 과정에서 설령 월선을 했다고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이들을 처벌한 것인데, 이는 법의 적용이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녀와 배우자에게도 숨긴 아픔, 이제는 드러낼 때

납북귀환어부 사건으로 처벌을 받거나 실형을 선고당한 피해자가 3천 명이 넘은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사건의 당사자는 물론, 주변 이웃들조차 이 사건에 대해 고발하거나 억울함을 제대로 호소하지 못했다. 남북 관계가 좋지 않은 그 당시 ‘간첩’이라는 누명을 썼기 때문에 피해자 본인은 물론 그들의 자녀들까지 손가락질 받을 거라는 우려로 인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평생 배우자에게조차 결혼 전에 자신이 겪은 피해 사실을 밝히지 않은 어민도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있었던 납북귀환어부 사건 재심 판결에서 처음으로 자녀들에게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힌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면 평생 목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던 이들을 위해 어떠한 사회적 장치가 뒷받침되어야 할까? 최우선적으로는 국가 기구가 나서서 이 사건을 밝히고 국가의 잘못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이 유죄라고만 생각한 채 살아온 피해자들에게 당시의 법 적용과 판단이 잘못됐음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지난해 사법부가 납북귀환어부 사건을 두고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되는 등의 사례가 점차 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기반으로 일반 대중들에게도 ‘국가의 잘못으로 억울한 피해자를 낳은 납북귀환어부 사건과 같은 일이 있었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시민들이 이 사안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피해 당사자들도 ‘이제는 대중들에게 나의 피해 사실을 드러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납북귀환어부 사건에 대해 알지 못했던 많은 국민들이 이 당시의 아픔에 보다 눈을 크게 열고 보다 가까이 귀를 기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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