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시대, 그리고 가야

고대는 신분제 사회였고,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왕을 정점으로 권력이 편제되는 구조였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왕권은 점차 강화되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귀족과 같은 특권세력과의 갈등이 있거나, 그들이 왕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양자는 상호 협력하며 정치를 운영했어요.

이제부터 언급되는 ‘발전’은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이나 전쟁을 통해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을 규제할 수 있는 법령(율령)의 존재여부, 혹은 사회 구성원들을 공통된 지도 이념으로 묶어줄 사상적 통합과정을 기준으로 보면서 시작하기로 해요.

왕의 권한을 먼저 세우자. 처음은 나야나!

고구려는 삼국 중 제일 먼저 체제를 정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어요. 고구려는 2세기경부터 주변 정복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점차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정복활동을 활발히 하고 성공하면 이를 지휘하고 책임지는 왕의 권위가 강화됩니다. 정복활동을 통해 강화된 왕권으로 왕위를 다른 사람이 아닌 혈육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형제상속으로 시작해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 부자상속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편 백제는 부여·고구려 계통의 비류·온조 세력이 한강유역으로 내려가 그 지역의 토착세력과 융합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됩니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한 세기 뒤인 3세기에 정복활동을 벌이면서 왕권을 격상시켜갑니다. 고구려가 주로 한의 군현이나 요동지방을 공격했다면 백제는 한강유역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지요. 이후 관리의 등급을 매기는 관등제를 정비하는 등 정치시스템을 조직하기 시작했어요.

다음은 신라입니다. 신라는 진한을 구성했던 사로국에서 출발합니다. 4세기경에 대외정복활동을 벌이면서 낙동강 유역의 진한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김씨에 의한 왕위세습을 확립합니다. 그 이전까지 박·석·김씨가 교대로 정권을 이어갔기 때문에 세습왕권이 확립되지 못했던 신라는 국가통합이 다소 늦었지요.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있어서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다가 점차 영역확장을 하면서 힘을 키우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나라의 꼴을 갖추자. 이번엔 나야나!!

정치적 발전의 지표로는 정치체제정비, 율령(법) 제정, 사상적 통합(불교공인) 등이 있어요. 이 기준으로 보면 백제가 앞선다고 할 수 있어요. 백제는 3세기 고이왕대 관제를 정비합니다. 관제정비가 곧 율령의 존재를 반증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제도라는 것 자체가 그를 위한 법령이 선행해야 구성된다고 보지요. 이후 백제는 4세기에 불교를 공인하게 됩니다.

다음은 고구려로 4세기 소수림왕 시기에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수용하여 구성원들의 정신적 통일을 도모합니다. 신라는 다소 늦습니다. 6세기인 법흥왕대에 가서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했지요.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 땅따먹기 혈전

비슷한 시기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해 어깨를 견주게 된 삼국은 한반도 안에서 각기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다가 결국 대면하게 됩니다. 삼국간의 항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이 항쟁에서 먼저 주도권을 잡은 것은 의외로 백제에요.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 마한의 전 지역을 통합하고 북으로는 고구려를 먼저 공격해서 광개토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을 전사시킵니다.

5세기, 광개토왕은 그 이름에서 추측 가능할 만큼 대외전쟁과 영토 확장을 많이 했어요. 광개토왕이란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를 줄여서 표현한 것이지요. 국강상은 매장지를 가리키고 광개토경은 말 그대로 영토(토경)을 넓게(광) 열었다(개)는 뜻이고, 평안은 나라를 안정시켰다는 뜻입니다. 고구려는 장수왕에 이르러 현재 중국 지안에 있는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427) 점점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합니다.

광개토왕의 세력 확장 사실을 알 수 있는 호우명 그릇.

자꾸 남하하는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와 백제는 두 손을 맞잡고 같이 싸우면서 고구려가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고자 했어요. 그러나 장수왕은 인정사정없이 백제의 수도를 깨뜨리고 한강유역을 모조리 차지합니다. 이 때 백제는 개로왕이 전사하고 고구려에 쫓겨 웅진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습니다(475). 백제는 웅진에서 가까스로 어그러진 체제를 정비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윽고 6세기 성왕대에는 사비지역으로 또 천도하여 다시 한 번 비상을 도모했습니다(538). 이어 백제는 연속되는 신라와의 연합작전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개로왕 때 빼앗겼던 한강 하류유역을 되찾았어요.

신라는 법흥왕대 율령반포와 불교수용으로 국내정치를 안정시켰습니다. 이후 진흥왕대에 불교교단을 통합하고 화랑도를 조직하여 인재양성을 도모합니다. 그리고 백제의 성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했습니다. 진흥왕은 한강 상류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곧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하류 유역까지 싹 빼앗아버렸습니다.

이에 격분한 백제 성왕은 복수혈전을 치르다가 관산성전투에서 전사하게 됩니다(554). 이를 기점으로 신라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반도 동남부 구석에 있던 신라가 한반도 중부의 한강을 차지해 버린 것입니다. 한강은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요지였기 때문에 한강을 두고 치열한 쟁탈전이 있었어요. 이후 진흥왕의 정복활동은 날개를 달고 함경도까지 갑니다.

거북아 거북아 가야를 내놓아라!

가야는 낙동강 하류 유역의 변한의 소국들 중 구야국으로부터 출발했다고 이해되고 있어요. 기원전후의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신라와 계통을 달리하는 소국이 등장한 것이지요. 가야는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전기가야)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가야의 건국설화로 김해의 구지봉에 가야지방의 아홉 촌장이 올라 거북이 노래를 부르고 춤추다가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 알을 받았고, 거기서 가장 먼저 태어난 아기인 수로를 왕으로 삼고 나머지 5명은 각기 다른 가야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전해요. 김해지방의 가야세력이 가야의 주도권을 잡았던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지요.

금관가야의 주도권은 4세기까지 지속되다가 고구려 광개토왕이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출정하면서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이후 고령의 대가야(후기가야)에게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지요. 가야는 4세기경 근초고왕 때 백제의 정복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백제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가 5세기 후반에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가야가 세력을 확장했어요.

그런데 6세기 신라가 대외확장을 하면서 금관가야는 법흥왕대, 대가야는 진흥왕대 신라에 결국 복속됐습니다. 우수한 철기문화를 보유하고 남조에 사신까지 보냈던 가야는 백제, 신라의 등살에 결국 사라졌어요. 그러나 향후 큰 역할을 하는 김유신처럼 가야출신들은 삼국사에 면면히 이름을 남겼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나라의 꼴을 갖추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기준으로 어느 나라가 어느 왕 때 무엇을 갖추었는지 표로 알기 쉽게 정리했어요. 이렇게 두고 보니 마치 누가 1등인가 경쟁하는 것 같지만, 이렇게 순서를 따지는 것은 ‘발전’을 기준으로 둔 것이에요. 물론 초반에는 뭐라도 먼저 한 쪽이 잘 나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역사에서 단선적인 발전만이 중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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