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Part 2 | 유발 하라리는 인간의 ‘이런 짓’에 화가 났다

사피엔스 Part 2 | 유발 하라리는 인간의 ‘이런 짓’에 화가 났다

《사피엔스》의 첫 장은 대단히 도전적인 서사였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라기보다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과 ‘우리’의 과거를 표현하는 거친 단어들에 더 눈이 갔습니다. 글을 읽는 내내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고 할까요? “넌 사실 존재 자체가 저주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지구에 미안함 감정이 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전 장에서의 도발은 다음 장으로도 이어집니다. 두 번째 장의 첫 절 제목이 “역사상 최대의 사기”죠. 이미 거친 표현으로 시종일관 ‘우리’를 비판했던 유발 하라리는 비판의 고삐를 더욱 당길 태세입니다. 인간이 농사를 위해 무슨 짓을 벌였기에 유발 하라리가 이렇게나 화가 나 있을까요? 그 시작점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역사상 최대의 사기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사피엔스는 변화를 시작합니다. 농업혁명의 시작입니다. 밀 재배를 시작으로 완두콩, 렌즈콩, 올리브, 포도 등으로 점점 늘려갔습니다. 염소를 기르고, 말도 기르기 시작했죠. 흥미로운 지점은 기원전 9,500년에서 3,500년 사이에 작물화되거나 가축화된 동식물들이 여전히 ‘우리’의 주식이라는 겁니다. 고대인의 식탁과 우리의 식탁은 언뜻 다른 것 같지만, 밑바탕에 있는 재료는 거의 같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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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흥미롭고 신기한 사실은 흩어져 살고 있던 고대 사피엔스들은 서로가 어떤 식물을 작물화하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로 비슷한 식물을 기르고 농업화했다는 사실입니다. 기원후 1세기 즈음 사피엔스의 대부분은 농민이 되었지만, 그 사실조차 서로는 모르고 있었죠. 다만 작물화와 가축화에 맞지 않는 동식물로 가득했던 호주, 알래스카, 남아프리카에서는 농업혁명이 나타나지 않았죠.

여기서 유발 하라리는 또 하나의 도발적인 비판을 이어 갑니다. 농업혁명을 바라보던 기존의 통설을 단칼에 잘라 버리죠. 그는 농업혁명이 진보라고 믿어왔던 시선을 “환상”이라 표현하며 농업으로 인해 ‘우리’가 수렵채집의 시절보다 외려 더 불만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잉여 생산물이 우리에게 곧 더 나은 식사와 더 많은 여유를 주지 않았다면서 말이죠. 농부가 된 ‘우리’는 수렵채집인보다 더 일했고, 더 열악한 식사를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발 하라리는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이자 “덫”이라고 표현합니다. 사피엔스의 농업화를 설명하는 유발 하라리의 시선에는 채식주의자로서의 관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사실 주장이 강한 만큼 근거가 그리 풍성하지는 않습니다. 장황하게 수렵채집인의 삶을 “편안”하게 묘사하지만, 딱히 그럴만한 사정에 관해서 설명하지는 않죠. 단지 농업노동으로 탄생한 신종 질병(디스크, 관절염 등)에 집중합니다. 오히려 이런 설명은 왜 ‘우리’가 그럼에도 농업이라는 “극한” 노동을 감내해야만 했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사피엔스가 밀에 ‘정착’한 것은 온난화 이후의 자연적인 우연이 겹치면서 일어났고, 어느 순간 방랑을 멈추고 정착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사피엔스》라는 책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죠. 저자의 관점이 가장 강하게 투영되어 있기에 생긴 약점입니다. 그렇게나 이상적이고 안락했던 “수렵채집”이라는 행위를 포기하고 농업을 선택한 계기가 너무나도 빈약하기 때문이죠.

수렵채집 생활은 분명 그 나름대로 효율적이었을 테고, 그러니 오랜 시간 사피엔스의 삶에 녹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 그 자체로 완벽한 삶은 아니었을 겁니다. 바로 이 불만족이 사피엔스로 하여금 농업이라는 새로운 생활로 옮겨가게 했을 테죠. 농업혁명을 ‘발전’과 ‘진보’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그 이전의 사회를 이상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시선은 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과일을 찾아, 사냥감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삶을 동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주관’이지 ‘정답’은 아니죠.

그가 덫이라고 부르는 농업혁명은 혁명적 변화였지만, 스스로 이야기하듯 순식간에 이루어진 빠른 변화는 아니었습니다. 덫이라고 불릴 만큼 과거와의 단절이 빠르게 이루어지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저자가 그리는 것처럼 대규모의 인구집중이 단기간에 이루어지지도 않았죠. 한반도 인근의 고대사회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초기 국가에 해당하는 많은 나라들(부여, 옥저, 동예, 고구려, 삼한 등)은 수렵채집과 농업을 병행합니다. 그랬던 이들이 농업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단순히 ‘덫’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그들에겐 농업이 식생활을 책임져 줄 훨씬 효율적인 수단이었던 겁니다.


📃피라미드 건설하기

농업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내 집”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며 이웃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로써 사피엔스는 수렵채집 시절보다 훨씬 “자기중심적”이 되었죠. 생활 공간도 훨씬 줄었습니다. 주변 환경에서 스스로를 떼어내고 인공적인 섬에 살아야 했습니다. 성벽을 치고, 잡초를 뽑아내고, 적대시하는 인간들을 박멸하며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하죠. 그렇게 정착에 성공한 사피엔스는 “옮길 수 없는” 것들을 쌓아나갔고, 장소에 매인 삶을 살게 되었던 겁니다.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농업혁명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미래”에 대한 걱정입니다. 농부들은 농업이 가진 근본적인 불확실성 때문에 언제나 소비보다 생산이 더 많아야 했고 “저장”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하죠. 미래에 대한 걱정(농부의 스트레스)은 곧 정치사회 체제의 토대가 됩니다. 지배자와 엘리트가 출현하게 된 것이죠.

즉, 사피엔스는 기댈 곳이 필요했고, 스스로 만든 새로운 집단에 걱정을 떠넘긴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걱정인형’들이 사피엔스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하죠. 사피엔스의 90%에 달하는 농부가 10%의 엘리트를 먹여 살리는 구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여기서 “신화”의 진정한 힘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밀집된 도시와 강력한 제국을 하나로 묶어 줄 수 있는 “위대한 신”과 그 신의 이야기가 필요했죠. 제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압제와 착취는 필수적이고도 불가결한 행위였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상상 속의 질서”를 만들기 시작했고, 신화는 기원전 1776년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어 냅니다. 법전의 탄생으로 계급은 제도화되고, 이에 따른 위계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로부터 3,500년 후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는 평등을 제도화하는 원칙을 만들어 냅니다. 바로 미국의 독립선언서입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사회를 규정하는 전혀 다른 두 원칙이 주장하는 “보편성”와 “정의”라는 단어입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피엔스 사회가 발전했기 때문일까요? 조금 더 평등해진 사회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유발 하라리는 함무라비 법전과 미국의 독립선언서 모두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둘 다 신화라는 것이죠. 미국인들이 주장하는 평등사상은 기독교 신앙의 변형일 뿐이라는 것이죠. 사피엔스는 평등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 진화해왔고, 서로 다른 특질을 발달 시키며, 이에 따라 생존 가능성에도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유발 하라리의 ‘역사관’이 빛나는 순간이며, 본인의 정체성과 문제의식이 만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생물학적 평등이란 신화이며, 서로 다른 진화를 인정해야 한다는 더 과학적인 믿음이죠. 각자의 생명체에게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변이가 일어날 수 있는 특징’이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어쩌면 역사를 공부하는 문제의식으로서의 유발 하라리의 시선은 다음의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르게 진화했으며, 이들은 변이가 가능한 모종의 특질을 지니고 태어났고 여기에는 생명과 쾌락의 추구가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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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특정한 질서를 상상해 내고 신뢰하는 이유는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효과적인 협력 때문이라는 유발 하라리의 분석은 대단히 날카롭습니다. 어쩌면 ‘성소수자’로서 스스로가 겪어온 인간 사회에 대한 일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의 질서가 누군가에게는 대단히 폭력적이고, 억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법이죠. 유발 하라리는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한 겁니다. 바로 이 강력한 상상이 피라미드를 만들고, 법전을 만들고, 심지어는 ‘인권’을 만들어 냈던 것이죠.


📃 메모리 과부하

사회가 복잡해지면서(혹은 집단이 거대해지면서) 사피엔스는 DNA에 각인된 ‘삶의 지혜’를 후손에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사회 운영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전 장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사실 사회를 운영하기 위한 ‘사회질서’라는 개념 자체가 상상의 산물이기에 DNA에 각인될 수도 없죠.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회를 유지 시키기 위한 정보의 양은 점점 더 넘쳐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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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정보”가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숫자입니다. 더 정확히는 “수학적 데이터”의 출현이죠. 정보의 종류가 철학, 문학, 역사 등이 아닌 이유는 당연히 초기의 문자 체계의 미숙입니다. 초기 문자는 곧 특정 유형의 정보만을 표현할 수 있었고, 이는 곧 숫자였습니다. 숫자의 필요성은 ‘세금’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 세금 지불액과 재산의 소유권을 기록한 문서인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피엔스가 단조로운 수학 데이터 이상을 쓰고 싶어 했던 시기는 기원전 3,000에서 2,500년 사이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오늘날 쐐기문자라고 불리는 문자가 발명되었을 때였죠. 이제 사피엔스는 시와 역사와 로맨스와 예언과 요리책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 종교에서는 각자의 성경을 쓰기 시작했고, “기록보관소”는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게 됩니다.

이제 문제는 ‘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데이터를 보관하고, 검색하고, 관리하는 방법에 대한 발전이 필요하게 된 겁니다. 이는 곧 관료제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효율적인 데이터 관리를 위해 10진법이 개발되게 되죠. 이 10진법의 탄생은 최대한 많은 언어를 숫자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곧 다시 2진법 문자 체계의 세상이 도래하게 됩니다. 바로 컴퓨터화된 2진법 문자 체계였죠.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곧 이 혁명적인 2진법 체계의 새로운 통치자(0과 1의 이진수)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죠.


📃 역사에 정의는 없다

유발 하라리는 이쯤에서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귀결시킵니다. 바로 “인류는 어떻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 체계를 고안”했기 때문이라고 정리하는데요. 상상과 문자라는 두 가지 발명품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했다는 뜻이었죠.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지점은 ‘상상’으로 만들어진 사회질서를 당대인들은 허구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자연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주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하늘’과 같은 ‘절대자’의 존재입니다. 인간은 늘 사회적 합의의 최종단계에서는 ‘태생적’인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들이밀었습니다.

지금은 마치 대단히 평등한, 혹은 위계질서가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며 살죠. 마치 모두 평등하다고 믿었던 20세기 초까지 흑인차별법이 있었음에도 당시 모두는 그것이 평등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과 마찬가지로요.

심지어 한번 만들어진 사회적 위계는 깨지기 무척 힘듭니다. 유발 하라리는 흑인에 대한 편견이야말로 신화가 깨지기 힘든 대표적인 예라고 말하죠. 그는 이 현상을 “악순환”이라고 규정합니다. 신화가 곧 진실이 되는 과정은 단순했습니다. 우연적인 사건으로 흑인을 지배하게 된 백인은 차별적인 법률을 만들어 흑인들에게 제대로 교육받을 권리를 빼앗고,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 시키죠. 이렇게 만들어진 신화(흑인은 열등하다)는 견고한 사회구조로 각인되고, 사람들은 흑인은 열등하다는 공식을 진실로 받아 드리게 되는 겁니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습니다. 신화를 깨야 한다는 거죠.

자, 이제 ‘우리’에게는 과제가 하나 주어집니다. 현존하는, 그리고 가장 오래된 사피엔스의 위계질서에 관한 물음이며, 그 위계를 어떻게 깰 것인가에 관한 불편한 과제죠. 바로 남자와 여자로 나뉜 위계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서 존재했고, 이로 인해 만들어진 위계는 사회적인 구조로 고착화되어 여전히 남성은 여성을 착취하고 있죠. 둘을 구분하는 분명한 생물학적 근거가 거의 없음에도 말입니다. 이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차이는 사실 대단히 사회적인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유발 하라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사회적 산물이라면 동성간의 관계는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과학을 맹신하는 지금에 와서까지 생물학에서 인정한 가능성(동성 간의 폭넓은 관계 맺음)을 문화에서는 금지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죠. 유발 하라리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부자연스럽다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생물학적 근거에 기반한 것이 아닌 문화적, 특히 기독교적 신학에서 온 것이라 날 서게 비판합니다. 결국은 ‘우리’는 여전히 신화에 갇힌 존재인 거죠.

과학(생물학)이 아닌 신화로서 규정된 성별 간의 위계는 언제, 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유발 하라리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근력의 차이, 남성의 폭력성, 가부장적 유전자 등을 설명하려 하지만 결국 스스로 명확한 정답을 내릴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적어도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가장 강력하게 오랜 시간 신화로서 존재했던 성별 간의 위계가 최근에 와서 많이 깨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여전히 큰 차이지만 빠른 속도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은 세계적인 현상이고, 최근 한국사회의 이슈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변화에 함께해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역사에는 정의가 없었지만, ‘우리’는 정의로울 필요가 있고, 그 정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역사, ‘정의로운’ 역사를 쓰는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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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아니라, 이런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 수렵과 채집을 하던 사피엔스는 정말 농사를 짓는 사피엔스보다 행복했을까?
  • 그럼 왜 사피엔스는 수렵과 채집을 포기했을까?
  • 사피엔스 사이에 존재하는 정체성에 따른 위계질서는 사라질 수 있을까?
  • 한국 사회는 다양한 정체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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