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 Part 2ㅣ한국인을 교육에 미치게 한 기원을 찾아서

📃왜 우린 죽을 각오로 배우려 했던가?

당신이 그 사실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한국은 교육에 단단히 미쳤다. 교육을 이 미친듯한 열정은 심지어 ‘유치원 입시’라는 말까지 탄생시키며, 5세 이하의 유아들까지 학업의 세계로 인도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학원의 굴레에 빠져 때부터 밤늦게까지 학원가를 전전한다. 중학교는 지옥과 비슷하고, 고등학교는 그냥 진짜 지옥이다. 지옥의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입시를 무사히 마친다고 지옥이 끝나는 건 아니다. 지옥의 끝엔 ‘취업’ 교육이 있다.

보통 우리는 이런 현상을 일컬어 ‘교육열’이라고 부른다. 사전적 의미로만 보면 교육에 대한 열의를 의미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교육열’은 단순히 ‘교육’ 자체에 대한 열의라고만 하기에 부작용이 너무 크다. 교육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 지나치다는 말이다. 대체 언제부터 그랬을까? 아니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왜 이토록 교육에 목숨을 거는 걸까?

‘역사책’인 줄 알고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교육 타령인가 싶겠지만, 교육에 대한 집착이 형성되는 과정이야말로 식민지 시기 차별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식민지 시기 교육정책을 확인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민낯, 그러니까 의도적인 ‘민족차별정책’을 통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교육정책은 상징적이었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이에 따라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바로 이 그 시절, 태어난 신분에 따라 본인의 지위와 계층이 결정되던 사회는 무너진다. 이제 능력만 있으면 경쟁을 거쳐 원하는 지위를 획득하는 일이 ‘형식상’으로는 가능해진 거다. 바로 이때부터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새로운 배움, 즉 근대교육을 수료했다는 ‘학력’이었다. 학력이 개인의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시작한 거다.

여기서부터 한국의 ‘교육열’이 출발한다. 근대적 교육기관에 입학하는 것이 계층 이동의 필수적 과정으로 굳어졌다. 곧 그 과정은 점점 ‘상급 교육기관’에 들어가야만 더 높은 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진화한다. 그러니까 성공하고 싶을수록 더 공부해야 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거다. 그게 그렇게 나쁜 거냐고? 그렇다. 이 자체를 놓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식민지 교육정책의 차별적 구조가 덧입혀진 거다.

바로 이 차별이 대단히 식민지적이었다. 조선의 ‘교육열’이 순수한 학습을 향한 열정이 아닌, 왜곡된 형태의 ‘성취 욕망’으로 꼬여 버리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거다. 대체 어떤 차별이었기에, 그리고 어떤 과정을 겪었기에 이토록 비정상적인 교육환경이 만들어지게 된 것일까? 하나씩 꼼꼼하게 따져 보자.


📃공부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학교에 입학해야 할 이유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기 이전, 조선에서의 근대교육은 개항 직후의 외국어교육이었다. 이 시기 만들어진 국립교육 기관인 육영공원을 비롯해 배재학당, 경신학교, 이화학당 등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도 역시 ‘메인 교육’은 외국어였다. 하지만 근대 교육기관의 학습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기 시작한 건 1894년 갑오개혁 때문이었다.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소학교와 사범학교 등의 관·공립 교육기관 설립이 본격적으로 계획되기 시작한 거다.

한편으로 같은 시기 국가 차원이 아닌 민간의 차원에서, 더 정확히는 당시 조선인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부국강병’과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민간이 주도하는 사립학교의 설립이 크게 활성화된 것도 이때부터다. 이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립학교는 기존의 서당을 빠르게 대체하면서 근대교육을 향한 조선인들의 욕구를 충족해 나갔다.

이런 분위기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더욱 거세지는데, 현재의 위기를 ‘근대교육’에 대한 미흡으로 파악하고 향후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민족주의에 입각한 근대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성학교, 오산학교, 보성학교,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 등 유명 사립학교는 바로 이때 설립된 학교들이다. 교육을 통해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1910년 국권 피탈은 조선인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을 한순간에 짓밟는다. 일제는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을 만들어 기존 조선의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계몽운동’의 성격과는 전혀 결이 다른 교육정책을 입안한다. 충실한 제국의 신민을 양성한다는 커다란 명제 아래 조선인들에게 ‘적당히’ 배울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적당히’라는 표현은 ‘보통 교육’이라는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해 학교 이름도 ‘보통학교’로 지어 버린다.

제1차 교육령의 핵심은 식민통치에 복종하고 최소한의 사회적 능력을 갖춘 한국인을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 많이’ 배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조선인은 보통학교(4년제)을 거쳐 고등보통학교(4년제)를 다니게 되었고 교육내용도 실업교육 위주였다. 자연히 기존의 조선의 지식들에 의해 만들어졌던 교육기관은 공립학교로 전환되어 일제의 ‘식민교육기관’으로 역할하도록 강제했다. 사립학교가 크게 탄압받자 사립학교 설립자들은 ‘야학’이나 ‘개량서당’ 등으로 전환하여 일제의 공립학교와 대결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럴싸한 곳으로의 취업이었다. 각종 임용시험이나 전문직이 되기 위한 시험 등에서 요구되는 학력 사항은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근대 직업을 얻기 위해서는 일제가 만든 ‘정규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했다. 구조에 적응하기 시작한 조선인들은 점점 더 보통학교로 진학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상급 학교로의 진학에 대한 욕구도 쌓여가기 시작한다. 공부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학생이 되어야만 했던 거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교육은 그렇게 조금씩 병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일제가 만들어 놓은 교육과정은 조선인들의 계층상승 욕구를 절대 제대로 담을 수 없었다. 관리 임용 조건에서부터 차별적이었다. 하급 공무원이었던 판임관의 자격에서조차 중등학교 이상의 학력이 필요했던 거다. 문제는 조선인이 교육받을 수 있는 보통학교와 상급 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는 ‘중등학교 졸업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일본인이 다닐 수 있었던 6년제 소학교와 5년제 중학교에 비해 수업 연수가 짧았기 때문이다.

조선인의 비뚤어진 근대교육을 향한 열망을 부추긴 건 일본 제국주의였지만, 그들은 조선인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해줄 의지도, 교육받은 조선을 제대로 대우할 의지도 없었다. 불만은 누적되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 3.1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누적된 불만을 해소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교육의 변화도 이때와 맞물린다. 식민지민이라도 어느 정도 계층상승에 성공할 수 있게 해주는 사다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다. 일제는 그것이 식민지배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 믿었다.


📃여전한 차별 속 좁아지는 ‘입학’의 기회들

3.1운동 이후 일제는 1922년 조선에 새로운 교육령을 공포한다. 바로 제2차 조선교육령이다. 수정된 교육령에서는 교육정책 중 가장 문제가 되었던 수업연한부터 손봤다. 보통학교를 6년으로, 그리고 고등보통학교도 5년으로 연장한 거다. 학제 상으로나마 일본과 비슷하게 맞췄고, 교과 내용도 실업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났다. 그렇다고 마치 바뀐 교육령이 일본과 조선 간의 제도적 평등을 실현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민족 간 차별은 여전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학교는 따로 운영되었고, 민족별로 입학정원을 따로 두어 공정한 경쟁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였다.

변화되는 교육환경과는 달리 일제의 조선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농촌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식민지 조선의 경제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소작농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암담한 현실 속에서 교육을 통한 사회적 지위 향상은 조선이 꿈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방구의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도 학교는 보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관공립보통학교를 비롯해서 상급학교의 졸업장은 ‘성공한 생활’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안정된 삶을 염원한 많은 조선인은 교육을 통한 학력 자본 획득에 매진해 나갔다. 회사에서는 사원 간 등급을 나누고 그 구분점을 학력에 뒀고, 등급마다 월급에도 차이를 뒀다. 바로 이러한 환경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욕망했던 조선인들을 유혹할 수 있는 충분한 카드였다. 문제는 식민지 조선이라는 사회에서 조선인이 차지할 수 있는 ‘성공한 자리가 과연 얼마나 있는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차원의 것이었다. 당연히 그 자리는 극히 적었으며, 이는 조선인에게 더욱 치열한 경쟁을 불러오게 된다.

이러한 경쟁은 상급학교로의 진학에서부터 시작이었다. 1920년대를 지나면서 조선인에게 보통학교 졸업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렇게 중등학교 입시는 ‘입시의 꽃’으로 불리며 가장 불꽃튀는 경쟁을 보였다. 1937년을 기준으로 28,172명의 중등학교 입학지원자 중 합격자는 겨우 4,489명에 불과했다. 전국 평균 6대 1을 넘었고, 서울 시내 학교는 대부분 10대 1을 상회할 정도였다. 이제 겨우 13~14세 무렵의 아이들이 평균 4대 1, 심하면 14~15대 1의 살인적 입시경쟁에 내몰리게 된 거다.

살인적 입시경쟁을 뚫고 중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그들 앞에는 고등교육기관, 즉 ‘대학입학’이라는 거대한 산이 놓이게 되었다. 심지어 그들이 향할 수 있는 조선 내의 고등교육기관은 단 하나, 경성제국대학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비정상적 교육환경이었다. 이는 곧 중등 교육기관을 ‘대학입학 준비기관’으로 전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중등교육 자체가 고등교육으로 가는 과도기적 성격으로 굳어진 거다. 사립학원이나 강습소, 가정과외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야말로 전 조선이 교육에, 아니 상급학교 진학에 미쳐버린 거다.


📃여전히 유효한 ‘교육 정상화’란 화두

조선에서의 심각한 입시경쟁은 일본, 정확히는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심각한 현상이었다. 조선인에게 교육이 입시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면서 일제가 교육을 통해 강조하려던 ‘황국신민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된 거다. 조선인들에게 교육은 이제 시험을 보기 위한 암기에 지나지 않게 된 거다.

게다가 보통학교를 넘어 중등학교 이상의 상급학교로의 욕망이 강해지는 건 조선총독부에겐 부담이었다. 조선인 고급인력이 양산되는 건, 그 자체로 ‘조선인 엘리트’의 양산을 의미했다. 이는 곧 식민지라는 시스템 속에서 ‘피식민지민’의 고급인력화를 뜻한다. 배움이 원래 그런 거다. 배운 사람이 적당하면 사회를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제대로 된 사회체제도 갖추지 못한 환경에서 배운 사람‘만’ 많아지면 그들은 곧 사회의 적대 세력이 되어버린다. 사회에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유휴노동력이 되어 버린 고학력자는 그 자체로 위협이었다.

하지만 그 위협은 곧 전쟁이라는 파도 속에서 한 풀, 아니 완전히 전복된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을 거쳐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은 일제의 ‘국가총동원체제’를 완성 시킨다. 이는 곧 교육 전반에 대한 전면적 통제로 이어졌다. 일제는 생산력 극대화를 위해서 조선의 학생들을 신속히 전쟁에 동원할 수 있도록 교육정책을 뒤바꿔 버린다. 교육이 실업교육에 집중된 거다. 고등교육은 점점 더 억제되고 통제되었다.

그 상태로 맞은 해방이었다. 미친듯한 교육에 대한 열망은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상황에 억눌려져 있었다. 해방과 동시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교육체제의 수립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새 나라의 교육은 해방 이전의 ‘식민교육’ 시스템을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근대적이고 주체적인 인재를 만든다는 원대한 목표 속에서 다시 기획되어야 했다. 하지만 36년의 긴 시간 속에서 이미 형성되어버린 비뚤어진 ‘교육열’을 정상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은 교육, 아니 입시에 미쳐있고 ‘교육 정상화의 노력’은 여전히 유효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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