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아니라 이성으로 : 계몽주의

지난 시간에는 과학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17세기에도 지식의 근원이 신에 있다는 믿음이 여전히 강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지식이 ‘인간이 이성의 힘으로 만들어낸 결과물’로 받아들여졌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에 좋은 자료가 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로 쏟아지는 새로운 지식들을 마주했던 유럽의 엘리트들은 지식을 분류하는 체계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이들의 소일거리 중 하나가 바로 ‘지식의 나무’를 그리는 것이었는데요. 지식을 상위분류와 하위분류로 구분하면서 전체적인 지적 세계의 지도를 작성하려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베이컨과 계몽주의자들이 그렸던 지식의 나무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계몽주의자들의 작업이 왜 유럽이 이전의 구체제와 결별하고 혁명으로 나아가는 데 영향을 미쳤는지도 살펴봅시다.

17세기의 자연철학자들은 신의 말씀이 두 종류의 책에 적혀 있다고 믿었죠. 하나는 성서, 다른 하나는 자연이었어요. 베이컨이 그린 지식의 나무는 이 구도를 반영해 두 개의 큰 줄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줄기, 즉 ‘신의 학문’은 ‘신의 계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이 내린 신호의 유형과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하위분류가 이어졌죠. 두 번째 줄기에는 ‘인간의 학문’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힘의 종류(기억력, 상상력, 이성)에 따라 역사, 시, 철학 등의 대분류가 있고 그 아래에 하위학문이 위치했죠. 베이컨은 인간의 경험과 인식을 통한 지식의 축적을 이야기했고 자연철학에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신의 섭리와 교회의 교리 역시 중요한 지식으로 취급했습니다.

베이컨과 뉴턴을 비롯한 17세기 자연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계몽주의자들은 과학혁명의 지적인 성과를 인간사에 적용하려 했습니다. 개별적인 사실에서 일반적인 원리로 나아가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인간에 적용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올바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 했던 것입니다. 계몽주의자들의 인간관은 기본적으로 긍정적이었습니다. 인간은 이성의 힘과 자유를 지닌 존재이며 이성은 인류를 진보하게 할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지닌 한계, 즉 무지와 미신이 이성에 기반한 교육과 도덕을 통해 계몽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삶을 관장하는 정치체제에 대한 사유는 계몽주의자들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이야기하며 자유로운 개인과 합리적인 정치체제의 관계를 정리했던 것입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 백과전서의 초판 표지

18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계몽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지적 성과물을 한데 모으는 <백과전서>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이 거대한 지적 작업의 서문에는 편집자였던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그린 지식의 나무가 수록되어 있었어요. 편집자들은 베이컨의 지식의 나무를 상찬하면서도 자신들의 그림이 무엇이 다른지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신의 학문’이라는 줄기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의 하위학문들은 모두 역사, 시, 철학(대분류는 베이컨과 거의 같았습니다)에 쪼개져 수록되었죠. 또한 교회의 교리는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는 이유로 지식의 체계에서 아예 배제되었습니다. 이러한 분류를 통해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지식을 축적하고 인류를 진보시키는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이야기했습니다. 훈련된 이성을 지닌 문인 혹은 철학자. 즉 계몽주의자들 자신이었죠

계몽주의 사상이 누구에게 읽혔으며 어떤 기능을 했는지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당시 유럽에서는 출판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독서대중이 크게 늘고 있었습니다. 구체제의 특권층에 반감을 가진 새로운 엘리트 계층이 성장하고 있었고 일반민중의 불만과 지적 수준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계몽주의는 기존에 존재했던 신학 기반의 지식 체계를 무너뜨렸습니다. 동시에 세속적, 인간 중심적, 합리주의적 사유의 성과를 종합함으로써 지식의 새로운 기반을 제공했죠. 무엇보다 세상이 변화하고 진보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무언가 혁명적인 일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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